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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노사이] 카레를 엎은 날 3 
작성일시 : 2016. 1. 16. 01:34 | 분류 : 장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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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째, 어떠한 경우에도 서로를 잊지 않습니다."

 "첫 번째부터 웃겨."

 "예. 선생님은 현재 저를 깨끗이 잊으셨으므로."


 제노스는 낯빛이 어두웠다. 만화잡지였다면 엄청난 양의 스크린톤이 제노스의 미간에 어둠을 표현하며 붙어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빗금 사이에 묻혀서 제노스가 멀리멀리 사라져가는 연출도 예상된다. 높은 확률로 하단에는 검은 성게 모양의 말풍선 속에 슬픈 독백이 가득 차 있다. 


 나는 첫 번째 약속 조항부터 나는 피식 웃어버렸다. 당시에는 나름 비장한 각오로 정한 연인끼리의 약속이었을 텐데 카레를 엎은 정도로 제노스와의 모든 기억을 깔끔하게 잊어버린 내 자신이 웃겼다. 연인을 이렇게나 간단히 배신할 수가 있다니. 그리고 그 사연의 주인공이 나라는 게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그러나 제노스가 제대로 우울했으므로  적당히 웃음을 거뒀다. 분위기가 무거운 와중에도 자꾸 입꼬리가 비죽비죽 올라가서 입을 가렸다. 첫 번째부터 웃겨서 영 곤란했다. 양 볼을 쓸어내리며 애써 웃음을 참았다. 


 "둘째, 다치지 않습니다.”

 “나는 근 몇 년간 다친 적 없어.”

 “예. 저도 파츠 갈아 끼우면 그만이지만.”

 "그래. 어지간한 폭탄 터져봤자 눈부신 정도고."

 "알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평범하네. 그럼 이어서 세 번째 읽어 봐.”

 “역겨워하지 마시길 바라며.”

 “안 그럴게.”


 내가 그 약속 조항들을 캐묻는 것은 순수한 궁금증에서였다. 그러나 제노스가 세 번째를 읽자마자 나는 실제로 약간 속이 울렁였다. 제노스의 경고를 주의 깊게 들었어야 했다.


 “셋째, 남들 눈에 띄는 부분에 키스마크 남기지 않습니다.”


 제노스는 슬퍼보였다. 왜냐하면 이제는 금지 조항 지키려고 노력할 필요조차 없어졌기 때문이다. 제노스는 세 번째 조항을 자기가 읽어놓고도 왠지 지금의 상황이 와 닿아서 슬퍼졌는지 또 한동안 말을 잇지 않았다. 반대로 나는 약간 속이 안 좋아졌으므로 말이 없어졌다. 침묵은 계속 이어졌다. 나는 웃기기도 하고 과거의 내가 신기하기도 하고 여전히 복잡한 심경이었다. 제노스보다 황당하면 황당했지 더 마음 편하진 않았다.


 “그따위 약속을 했었냐.”

 “먼저 제안하셨습니다.”


 제노스는 조항은 요약하고 요약해서 열 개까지 있다고 미리 소개했다. 우리는 같은 집에서 살아나가며, 함께 약속 노트의 개정을 여러 번 거쳤다고 한다. 서로 합의 하에 꼭 필요한 것으로만 추려 10개로 요약했단다. 그 증거로 약속 노트는 80퍼센트 정도는 뜯겨나간 상태였다. 취소한 조항이 많다는 뜻이다. 제노스가 지금 읽어주고 있는 것은 마지막 부분에 정갈하게 적힌 손바닥 크기 분량의 메모였다.


 “네 번째는 다른 사람에게 필요 이상으로 상냥하지 않기 입니다.”

 “우리 직업이 히어론데?”

 “시민에게 베푸는 친절은 목숨 구해주는 정도에서 그치기로 했습니다. 처음에는 무심한 성격의 선생님께서 위험에 빠진 시민들 한정으로 다정함 베푸시는 모습 동경하고 존경했습니다만, 나중에는 연애감정이 더 커졌습니다. 그래서 점점 질투했습니다.”

 “히어로 일에 대해 잘 알고 있잖아.”

 “머리로는 잘 알면서도 그랬습니다.”

 “바보 같네.”

 “선생님도 아주 가끔이지만 질투하셨던 걸로 기억합니다.”

 “내가?”


 제 착각이었을까요... 라고 중얼거린 제노스는 한동안 또 말이 없었다. 추억 상자인지 뭐시긴지 혼자 열어보고 있겠지. 그거 테이프 좀 많이 감으라니까. 제노스는 한동안 묵묵했다. 얼마나 조용했냐면, 이 묵묵한 상태의 제노스보다 차라리 저금통이 더 시끄럽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저금통은 물건이지만 위아래로 흔들면 짤랑거리기라도 하지 않은가.


 "그럼 다음 조항 읽어봐."

 "싫습니다."


 제노스가 내 지시를 거부하는 건 생소했다. 역시 반 년이 너를 바꾸어 놓았구나. 제노스는 고개를 약간 돌리고 있었다. 제노스는 금빛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면서 망설였다. 


 "다섯 번째 읽으라니까."

 "읽자마자 분명 선생님이 저를 영영 싫어하게 됩니다. 그래서 읽고 싶지가 않습니다."

 "싫어하지 않을게."

 "거짓말이시죠."


 나를 상대로 거짓말이라는 단어 입에 담다니. 제노스는 정말 많이 변한 것 같다.


 "애초에 별로 좋아하지도 않으니까, 싫어지지도 않을걸."

 "제발, 제발... 그런 말씀 하지 말아주세요."


 제노스는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지금 내 주머니에 목캔디 있는데, 이거 전부 걸게."

 "다섯 번째를 읽더라도 부디 저를 싫어하게 되지 않겠다고 약속해주세요."

 "그래서 목캔디 걸었다고? 나로썬 많이 거는거야?"

 "..."

 "..."

 "..."

 "..."


 제노스가 자꾸 쓸데없이 뜸을 들이길래 재촉했다.


 "빨리 말하라니까. 이런 사소한 것도 안 가르쳐주는 시점에서 너가 싫어져."

 "그럼 다섯 번째 읽겠습니다."

 "응."

 "z시 고스트타운 금지구역에서 1달에 1번은 옥외섹스 합니다."

 “...”

 “...”

 “...”

 “...”

 "제노스."

 "...예?"

 “목캔디 먹을래?” 


 제노스의 앞으로 목캔디를 주섬주섬 꺼내서 밀어주었다. 제노스는 침통하게 목캔디 무더기를 보았다. 레몬 맛도 있고 박하 맛도 있었다. 나는 정직하게 주머니를 뒤져서 복숭아 맛도 꺼내주었다. 뒤져보니 박하 맛이 하나 더 있기에 그것도 주었다. 나는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다.


 "저를 싫어하게 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었습니다."

 "목캔디 줬잖냐."

 "목캔디는 처음부터 탐나지 않았습니다!"

 "그래? 그럼 내가 먹는다."


 나는 다시 목캔디를 주머니로 집어넣었다. 제노스는 얼굴에 더 많은 스크린톤이 붙여진 것 같다. 박하 맛은 두 개니까 그래도 주는 게 낫지 않을까 싶어서 제노스의 손에 올려주었다. 제노스는 주먹 쥐고 있었으므로 그냥 손등에 목캔디 올려주었다. 제노스는 손등 위에 올라간 박하 맛 목캔디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더니 말을 이었다.


 “금지구역이니까 거주자가 없습니다. 보는 눈이 없어서 괜찮았습니다.”

 “우연히 히어로 협회 드론 카메라에 촬영이라도 당하면 참 재밌겠네.”

 "...이왕 이렇게 된 거, 모두 막힘없이 읽겠습니다."

 "그러던가."

 "여섯 번째, 요리는 전부 제가 합니다."

 "그건 들었어."


 사귀게 된 이후 요리는 온전히 자기 몫이었다고 말하던 제노스가 기억났다. 제노스의 말에 따르면 나는 제노스가 하는 밥을 좋아했다고 한다. 단지 편해서 그랬던 거 아닐까. 나는 살아감에 있어서 최소한의 동작을 지향한다. 목구멍 끝까지 올라온 반박을 이성적으로 도로 집어넣었다. 


 "일곱 번째, 서로에게 거짓말하지 않습니다."

 "폭탄조항 몇 개 있고 평범한 것들 많네."


 슬슬 과거의 내가 제노스와 함께 꾸몄던 미친 짓에도 면역이 되려는 참이었다. 따지자면 항목 하나하나 날벼락이고, 내겐 재앙과도 같지만. 일단은 궁금했으므로 들어나 보자는 기분으로 그냥저냥 끄덕였다. 


 "여덟 번째. 바람피우지 않습니다."

 “나는 바람피울 의욕 같은 거 없지만.”

 “그야 알고 있지만, 너무나 좋아하니까요. 예방해두고 싶었습니다.”


 제노스 너, 좀 바보같아진 수준을 넘어서 사람이 변했잖냐. 아홉 번째나 읽어보라는 식으로 턱으로 노트를 대충 가리켰더니 제노스가 아홉 번째를 읽었다. 


 “아홉 번째, 우리 언젠가는 결혼합니다.”

 “하하학. 크하하하.”


 그 아홉 번째를 듣자마자 내 상체는 앞으로 왈칵 고꾸라졌다. 나는 고개를 책상에 박고 웃었다. 웃느라 숨이 모자랐다. 이렇게까지 대책 없이 크게 웃어 본 건 정말 오랜만이다. 언제나 그냥 무던한 일상이었다. 압도적인 힘을 얻게 된 이후, 나는 감각이 무뎌져서 잘 웃지 않았다. 헛웃음 정도는 간혹 지었지만 이렇게까지 박장대소 해본 적 없다. 


 스스로 웃는 내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로 웃었다. 흰 쌀밥 반 공기 정도의 칼로리 없앴다 싶을 정도로 웃었다. 너무 웃어서 복근 개수 한 두개 늘었을지도 모른다. 웃다가 눈물이 고이기 시작하는지 눈앞이 다 흐릿했다. 그런 나를 보는 제노스는 거의 시체 같은 무표정을 짓고 있었다. 시야가 흐려선지 무표정한 제노스가 울렁울렁 찌그러져 보였다. 그래선지 더 웃겼다.


 “네가 나 몰래 적은 거 아니야? 내가 아홉 번째 조항 동의했을 리가 없는데?”

 “네. 처음에는 동의 안하셨죠. 미쳤냐고 하셨었습니다.”

 “그래 임마! 넌 미쳤어!”

 “남자끼리지만, 서로만 인정하면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가능은 개뿔.”


  아홉 번째 조항 너무 파괴력 강했다. 나는 웃느라 생리적으로 눈가에 고인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제노스는 내가 고꾸라져 웃던 말던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여전히 새침하고 우울한 표정이었다. 그 무표정의 딱딱한 조형감이 명암 확실한데다 고전적으로 잘생겨서 더 웃긴 것 같았다. 아까부터 어쩐지 천장이 보이기 시작하기에 어리둥절했는데 나는 누워서까지 웃고 있었다. 제길, 진짜 웃기다. 결혼...


 “처음에 선생님은 처음에는 결혼은 말도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당연하지.”

 “프러포즈 정말 열심히 준비했는데 단칼에 거절당했습니다.”

 “잘한다! 과거의 나!”

 “...그러던 어느 날, 제가 용급 괴인과 전투하다 죽을 뻔 했을 때.” 

 “...”

 “선생님은 박살난 저의 잔해를 주워들고 살아달라고, 결혼하자고 말씀하셨습니다.”

 “...”

 “...”

 “...”

 “그래서 저는 연구소에서 아득바득 살아나버릴 정도로 기뻤습니다.”


 말 그대로 기뻐서 살아났어요. 제노스는 보일 듯 말 듯 웃었다. 그리고 또 저금통의 고요함에 버금갈 정도로 숙연한 무표정을 지었다. 뭐냐 이 무게감 엄청난 사연. 대체 뭐냐, 이거. 이게 내 얘기라고? ... 나는 천천히 웃음기가 가셨다. 얼굴의 핏기도 가셨다. 나는 아홉 번째 조항의 무게감에 질식해버릴 것 같은 기분이 됐다. 이건 보통 부담스러운 수준이 아니다. 그냥저냥 기분좋게 알콩달콩 사귄 정도가 아니었다. 예상보다 너무 지독하게 사랑했다. 


 결혼이고 뭐고 다 해줄 테니까 제발 살아나줘. 부디 그때의 약속 지키게 해줘. 라며 애인의 잔해를 주워들고 흐느끼는 비장한 연애는 세기말의 우주도시를 배경으로 한 소년만화에서나 볼 줄 알았다. 그렇게 시나리오 있고도 남을법한 지독한 연애를 내가 하고 있었다니 진땀이 난다. 


 “불과 반년동안 이런 뜨거운 사랑 했었냐.”

 “예.”

 “미안하다. 제노스.”

 “예.”

 “까맣게 잊어서 미안.”

 “예.”

 “그렇지만, 내 입장도 생각해줘. 나 정말 황당해.”

 “압니다.”

 “결혼은 무리야.”

 “...”

 “사귀는 것도 무리. 헤어지자.”

 “저 아직 열 번째 조항 안 읽었습니다.”

 “응?”


 제노스는 이 열 번째 조항을 읽기 위해 노트를 꺼냈다는 듯이 열 번째 조항을 읽었다.


 “열 번째. 위의 조항 중 하나라도 어기면 상대방의 요구를 하나 들어줍니다.”

 “...”

 “마지막 조항의 효력 발동으로, 관계 유지를 요구하겠습니다.”


 이제 나는 제노스가 이 노트의 조항을 조작한건 아닐까 싶을 정도가 됐다. 정황 너무 잘 들어맞는다. 앨범은 조작이 아니라고 치더라도 노트는 조작 같다. 나는 첫 번째 조항을 어겼으므로 제노스의 요구를 들어줘야 하는 을의 위치에 서게 되었다. 처음부터 약속 노트가 현재의 나를 압박할 수 있는 흐름으로 작성된 것 같다. 이건 자연스러움이 도가 지나치다.


 “너무 정황 잘 맞는데. 노트는 네가 조작한 거 아니야?”

 “아닙니다.”

 “내용이 너무 자연스럽잖아.”

 “선생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저야말로 이 상황이 조작이 아니라는 확신이 듭니다." 

 "..."

 "그래서 슬픕니다."

 "..."

 "저는 사실 지금까지 선생님이 기억상실이라고 장난치시는 건 아닐까, 하고 마지막 희망의 끈 놓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답지 않게 그렇게나 잘 지켜주셨던 약속들 의심하시는 지금에야 드디어 현실이 실감납니다.”


 제노스는 또 슬픈 무표정을 짓고 난리였다. 제길, 놈은 이제 저 표정이 기본 표정으로 고정되어 간다. 나는 조금 화 내보려고 했지만 그만두었다. 제노스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짓는 표정 하나하나 [제가 죽어버리면 당신 마음이 편해질까요] 수준의 무게감이 느껴졌다. 무엇보다 저 녀석 거짓말을 할 성격 아닌 것 같고. 


 아무튼 나는 대충 알았다고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노스가 계속 사귀는 건가요. 라고 묻기에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이 불편한 자리에 오래 있고 싶지 않아서 편의점에라도 갈 생각이다. 오전의 기억으로는 캔 맥주 1+1 하고 있었던 것 같다. 




 편의점에 가는 길은 추웠다. 깡마른 길고양이가 자동차 엔진 밑에서 잠들어가는 평범한 겨울 풍경이다. 잠든 고양이는 임신했는지 배가 불러 있다. 웅크린 모양새가 누군가의 어머니의 모습이라기엔 너무나 동그랗고 작다. 추운 겨울을 잘 견뎌낼 수 있을까 걱정되지만 지금으로썬 캔 참치가 없어서, 평화롭게 잠든 어미고양이의 생애에 관여할 자격도 없다. 



 편의점으로 가는 길에 눈에 익은 건물들을 지나치며 머릿속으로는 많은 생각이 들었다. 제노스와 계속 사귄다니. 지금으로썬 어쩔 수 없다. 반강제적으로 관계 유지하게 되었다. 내가 원해서는 아니고 그냥 분위기상 그렇게 흘러갔다. 제노스에겐 관계 유지겠지만 나는 기억을 잃었으니까 관계 유지라기보다 새로 사귀는 느낌이다. 


 그래서 더 황당하다. 내 상황이 나조차 이해되지 않는다. 하지만 약속 노트의 조항들을 모두 듣고 나니 자연스럽게 대화가 그렇게 마무리 되었다. 그렇다고 예전과 똑같이 지내 줄 계획은 아니다. 그냥 명분뿐이다. 더 큰 골칫거리 생겨버리기 전에 간단히 임시조치 취한 것이다. 구멍 난 둑에 손가락이라도 끼워보는 심정으로 그렇게 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이 상황에 좀 더 눈에 띄게 난리치며 환장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미 깨달은 현실에 굳이 반발하는 게 더 귀찮다고 생각해서 그냥 인정해버렸다.



 나쁜 꿈이겠거니 넘겨짚고 무시하고 싶지만, 그러기엔 이미 나이 많이 먹어버렸다. 현실 도피할 정도로 철이 없지는 않다. 내가 벌인 일 정도는 책임져야 한다. 그나저나 고스트타운 옥외섹스 조항 어떻게 하지. 막막하다. 그냥 그때도 어겨버리고 패널티 받으면 되려나. 그 패널티 어려운 게 아니었으면 좋겠다. 


 제노스 개인의 요구였다면 무시했겠지만, 과거의 내가 가담한 짓이라 지키는 수밖에 없게 됐다. 공동책임이다. 나 스스로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나의 과오는 얼마나 더 남은 걸까. 





 그리고 결혼 조항은 어떡하지. 다른 건 다 참아 넘긴다 쳐도 결혼 관련 이야기는 진짜 미쳐버릴 정도로 막막하다. 처음에는 웃겼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그거야말로 엄청난 큰일이다. 망했다. 그때도 패널티 받는 정도로 넘어갈 수 있으려나. 제노스 나와 사귄 뒤에 감정표현도 풍부해진데다 이전보다 묘하게 기세등등해졌으므로, 의견 피력 상당히 강해졌다. 그래서 지금 내가 하는 걱정은 이건 막연한 염려 수준이 아니라 내 인생이 걸린 걱정이다. 



 제노스의 기세 변화를 보고 있노라니 왠지 시대극을 보는 것 같았다. 첩이 정실부인이 되고 나면 뭔가 전보다 표정도 말투도 강해지지 않는가. ‘나는 사랑받고 있으니까 이래도 된다’ 는 확신이 생긴 기세가 된다. 아무튼 최근의 제노스는 그런 묘한 당당함과 여유가 있다. 전에는 내가 화를 내면 할복이라도 할 기세로 침통해하며 도게자로 엎드려 사과하던 녀석이었는데, 최근에는 내가 화를 내도 그냥 씩 웃기까지 한다. 나 모르는 사이에 호스트바 경력이라도 쌓았나 싶을 정도의 여유로움이었다. [왜 그렇게 발톱을 세우고 있나요, 아기고양이] 류의 열받는 대사 칠 것만 같았다. 실제로 그런 대사를 칠 리는 전혀 없지만 상상하니 열 받는다. 



 아니 나는 제노스의 그런 여유로운 모습 모른다고. 그냥 이번에 처음 느낀다고. 젠장. 저 자식이 반년동안 쌓은 경험치 따위 내 기억에 없다. 너무 억울해서 근처 아파트라도 뽑아버리고 싶은 심정이지만 히어로 일 외에 건물을 파괴하면 수리비 청구 걱정되니 참는다. 세상은 내게 이렇게나 잔혹하고 각박하다. 카레를 엎었을 때 카레를 먹지 못하는 것만으로는 불행이 마무리되지 않는다니. 백화점 로비에 대자로 드러누워 울어제껴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 내 어린 시절. 그 때는 풍뎅이와 잠자리를 채집함에 잔뜩 모으거나, 간단한 한자를 받아쓰다가 틀리거나, 팔을 풍차처럼 돌리며 울어도 다들 내버려 뒀었다.


 나는 마음은 복잡했지만 침착하게 캔맥주를 계산했다. 멋대로 살아갈 수 없게 된 대신 나는 캔맥주를 마실 수 있게 됐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그런 것이다. 책임과 권리를 등가교환 하는 과정이다. 그게 반강제라는 점이 조금 싫지만. 삶이라는 게임에 나 라는 캐릭터를 가지고 돌입한 이상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나이에 만족하며 살아가야 한다. 편의점 오는 길에 본 어미 고양이도 그렇게 생각하며 불가항력의 겨울을 꿋꿋이 살아나가는 중이다. 


 물건을 다 고르고 편의점 문을 나서는 종소리와 함께 입김이 기세 좋게 끼쳐나갔다. 이 흰 연기는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다. 살아있는 이상 내가 한 일에 책임을 져야지, 나는 어른이잖아. 최대한 얼음길을 천천히 걸어가며 나 자신을 타일렀다. 걷는 동안 낡은 가로등이 한 개 깜빡이다 점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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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기억을 잃은 이후 처음으로 히어로복을 입는다. 히어로복은 어린아이 우주복처럼 입어야 하므로 나는 사각 트렁크를 제외한 모든 옷을 벗었다. 다리를 노란 슈트에 집어넣으며 중얼거렸다. 오늘은 어떤 괴인이려나... 


 경고 받은 재해레벨은 '호'다. 위치는 뉴스로 대략 파악했으나, 외형에 대한 설명을 아직 듣지 못했다. 이번에는 시민들이 사진으로 제보할 여유도 없이 대피한 모양이다. 괴인이 출현하면 그 주변이 망가져있고 굳이 애써서 찾으려 하지 않아도 눈에 띄게 흉흉한 기운 감도니까, 그 분위기를 감각으로 추적해서 찾아가는 경우도 더러 있다. 아마 오늘 그렇게 하면 될 것 같다.


 나는 붉은 장갑을 끼고, 어깨를 붕붕 돌려 보았다. 불편하거나 결리는 느낌 전혀 없다. 컨디션 꽤 괜찮다. 이어서 장화도 신었다. 요즘 들어 제노스는 볼 일이 많은지 자주 외출한다. 녀석은 S급이니까 나와는 다른 사건을 처리하러 갔을 것이다. 그나저나 나는 반 년 동안 순위 안 오른 걸까. 그렇다면 왜? 왜지? 나 노력 안했나? 열혈까진 아니어도 나름대로 노력 꽤 했을 텐데. 그 이유는 나중에 제노스에게 한꺼번에 물어봐야겠다. 그런데 그 녀석 내가 말 시키면 엄청 대답 장황하니까 견디기 힘들다. 요약하는 습관 들이랬는데, 치사하게 사귀는 동안 도로 장황한 녀석으로 되돌아왔다. 아무튼 앞으로 되도록 질문은 모아서 한꺼번에 할 계획이다.


 괴인 출현했다는 위치로 접어들수록 도로가 휑하다. 기묘한 긴장감이 느껴졌다. 박살난 콘크리트의 잔해가 점점 많이 보인다. 그리고 음산한 기운이 느껴진다. 나는 계속 걸어갔다. 괴인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것 같다. 


 도착한 곳에는 아마이 마스크가 있었다. 푸른 빛의 큐티클한 머릿결을 휘날리는 그 남자의 발 밑에 괴인은 이미 드라마틱하게 개죽음당해 있었다. 아마이 마스크는 검붉은 피로 축축하게 젖은 손을 닦는 중이다. 나는 순식간에 할 일이 없어졌다.


 "늦었네."

 "어."


 아마이 마스크는 한 손을 들어 아는 척을 했다. 저 자식 나랑 친했었나. 반 년 동안 인사 할 정도로는 친해졌었나 보군.


 "내가 헛걸음하게 했나."

 "뭐 그렇네." 

 "흐응. 그래. 그렇다면 됐어. 사이보그는?"

 "제노스는 같이 안 왔어."

 "다음번 인기투표에선 제대로 죽여버린다고 전해."


 ...엥? 어리둥절해서 아마이를 올려다봤다. 나름의 농담이었는지 아마이는 그답게 연극적인 제스쳐로 손가락을 딱 튕겼다. 우리 생각보다 훨씬 친해졌구나. 아마이 유명 연예인 아니었던가. 성격 더러워 보이는 유명 연예인과 친해지다니, 파헤칠수록 나의 잃어버린 반 년 놀랍다. 안부 전하면서 히어로 인기투표 근황으로 농담 할 정도로 친하다니. 매우 놀랍지만 그냥 적당히 분위기 맞춰서 친한 척 해 주자.


 “인기투표는 또 무슨 소리야.”

 “사이보그가 딱 한번이지만 이번 주에 나 이겼으니까 말야.”

 “엥. 너 팬덤 관리 망했네.”

 “망했다니!”


 아마이는 조금 발끈하는 것 같았다.


 “나를 이기는 건 그놈 인생에서 딱 1주뿐이다.”

 “뭔 일 있었냐. 너 마약하다가 매스컴에 걸렸구나.”

 “왜 내가 멸망하는 방향으로만 예상하는 거지.”

 “아님 말고.”

 “너 뉴스도 안 보는건가. 취재 일절 거부하던 히어로가 처음이자 마지막 방송 출연했으므로, 그 이슈의 효과를 봐서 반짝 순위 급등했던 거다.”

 “나... 그런 소식에 밝은 편이 아니라서.”


 나는 인터넷을 즐겨 하는 사람도 아니고, TV도 보는 프로그램이 정해져 있어서 소식이 느리다. 제노스가 직접 말해주지 않으면 잘 모른다.


 “본인 결혼 관련해서 공식발언 했으니까 말야.”

 “그러냐.”

 “연인의 정체가 세간에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러니까 곧 네 얘기다.”

 “그러냐.”


 애써 침착하게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경악했다. 망할 제노스놈. 나와의 사생활 언론에 그렇게나 냉큼 일러바치다니. 아무리 바빠도 밥은 같이 먹곤 했는데, 어쩐지 어제 저녁이랑 오늘 아침까지 모습이 안 보인다 했다. 결혼에 대해 다시 고민해준 건 고맙지만 밖에서 그런 짓 하고 돌아다니다니. 아마이는 손수건으로 손에 묻었던 피를 마저 닦더니, 대기하던 차에 타고 스르륵 사라졌다. 


 괴인의 시체와 나만이 남은 공간은 황망했다. 괴인이 날뛰었던 도시는 불규칙하고 처참하게 무너져 있었다. 콘크리트 바닥은 구멍이 없이 멀쩡한 부분이 더 드물었다. 그런 게임 스테이지 같은 공간에 서서 나는 중얼거렸다.


 뭐지.... 방송이라니.


 나는, 지금, 무슨 상황에 처한 거지...

 제발 이 상황, 누군가 내게 나쁜 꿈이라고 말 좀 해줘...


 집에 가면 노트북 켜서 제노스 이 자식 뭐라고 했는지 정도는 알아봐야겠다. 일시적이지만 인기투표 1위가 됐다면 엄청난 이슈일 테다. 공중파로 방영됐으면 그 동영상 편집해서 누군가 인터넷에 올렸을 게 뻔하니까 그걸 보면 된다. 집으로 비척비척 걸어가는 길에 별의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아무리 그런 충격 발언을 했다고 해도 부동의 1위인 아마이를 이기다니. 대체 어디까지 자극적인 짓을 한거냐. 제노스는 언론을 굉장히 싫어했다. 그런데 왜 밝힌 걸까. 자기 사생활 세상에 떠벌리고 다니는 타입 아니었던 것 같은데 모종의 목적이 있어서 출연한 게 틀림없다. 그 목적은 좀 궁금하다. 


 나는 초탈하고 소박한 인생을 살고 있었는데, 최근은 내가 모르는 채 멋대로 돌아가는 내 주변 상황들을 허둥지둥 추적해가며 살아간다. 삶에 활력이 생긴 점은 좋지만, 이렇게 당황스러운 방향의 활력은 바란 적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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