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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노사이] 카레를 엎은 날 8 
작성일시 : 2016. 3. 15. 07:29 | 분류 : 장편






 학창 시절, 나는 사실 조금 왕따였다. 인정한다. 그렇다고 아주 대놓고 따돌림 당하는 건 아니었다. 단지 대화 분위기를 읽을 줄 몰라서 반 아이들이 어울리는 활동에서 평균보다 조금 뒤쳐졌을 뿐이다. 회상해보면 반의 주류인 친구들이 나를 걸고 내기를 하면 내심 심장이 뛰었다. 예를 들면 '사이타마는 필기구가 10개 미만이다' 같은 사소한 내기였다. 내 필통을 벌려보고 결과만 확인한 뒤 아이들은 사라졌다. 아주 잠시간이었지만 나는 그들과 어울린 기분이 되었다.


 다시 냉정하게 생각해보려니, 이거 평균보다 조금 뒤쳐지는 정도보다 심한 것 같다. 아주 왕따였던 건가? 주로 엎드려서 자곤 했으니까 정확히는 모르겠다. 현실도피로 잠을 자는 건 또 아니었다. 수업은 진짜 졸렸다.



 신발장에 저주편지를 받거나 책상을 커터 칼로 난도질당하는 고전적이고 격렬한 미움은 받지 않았다. 내게 그럴 가치는 없었다고 생각한다. 좀 더 튀는 행동을 하고 다녔다면 그런 미움을 받았을지도 모르겠다. 학기 초에 무심코 숙제를 잊어서 시선을 모았던 적이 있었다. 그래도 그 이후로는 숙제를 그럭저럭 잘 해왔고, 다른 아이들도 숙제를 잊는 경우가 많아서 내가 튀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는 학창시절 내내 사소하고 잔잔한 방식으로 겉돌았다. 예를 들면 체육시간에 조를 짤 때, 조를 주도하는 무리를 지켜보다가 가장 마지막으로 아무 조에나 합류하는 식이었다. 그런 사소한 일상사건에 일일이 상처받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마음에 잔잔한 괴로움을 남긴 것은 사실이다. 나도 모르게 내 마음은 어두운 남색이 됐다. 아주 우중충한 검정은 아니지만, 새파란 하늘색도 아니게 됐다는 뜻이다. 나는 친구가 없는 내 상황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부러 더욱 혼자 다니고 나는 혼자라도 괜찮다고 자기최면을 걸었다. 그리고 익숙해졌다. 그 합리화의 기억이 오래되자 이제는 혼자인 것이 썩 외롭지 않다.


 중학교 때의 나는 지금보다 왜소하고 말랐으며, 무성한 검은 흑발을 가지고 있었다. 성격은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당시는 인정하지 않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중학생인 나는 따돌림 당할 요소를 잘 갖추고 있었다. 평범한 얼굴에 무심한 표정, 현실적이고 재미없는 성격이다. 딱히 공부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중학생인 나는 친해져도 얻을 이득이 없는 길가의 돌멩이 같은 포지셔닝을 하고 있었다. 취할 이득이 없는 캐릭터가 수요가 없는 것은 당연하다. 뭐 내게 친구가 아주 없었던 건 아니지만 가끔 있어봤자 나처럼 그저 그런 녀석들뿐이었다. 





-





 내가 눈을 뜬 것은 오후였다. 제노스가 입 맞춰오는 게 성가셔서 깼다. 내가 오래 자고 있으니까 자는 얼굴 들여다보다가 문득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한 모양이다. 피곤해서 별로 깨고 싶지 않았는데. 섹스 좀 해 줬다고 제노스는 자기 멋대로 나와의 마음의 간격 좁혔다. 참, 설레발도 저 정도면 재능이 아닌가. 보통의 사람이라면 노력해도 저렇게 뻔뻔하게 굴지 못한다.


 나는 산더미 같은 쌀밥을 해치우는 푸짐하고 좋은 꿈을 꾸고 있었으므로 깨게 된 것이 조금 짜증났다. 꿈속의 쌀밥더미는 아무리 먹어도 배부르지 않고 달콤했다. 밥알마다 일일이 윤기가 흘렀다. 그야말로 질 좋은 쌀밥이었다. 나는 간장 종지와 수저를 손에 들고 그 산을 먹어치워 나갔다. 등산을 하는 것처럼 밥 더미를 올라가며 먹었다. 꿈이 으레 그렇듯이 나는 이 상황이 전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고 그저 행복하기만 했다. 반찬은 간장 하나뿐인데도 불만 한 점 없이 즐거웠다. 뭉실뭉실 김이 올라오는 뿌옇고 환상적인 공간에 오로지 나 혼자였다.


 아직 꿈이 아른거리는 몽롱한 와중에도 내 볼을 쓰다듬으며 입맞춰오는 제노스를 나는 제대로 밀어냈다. 마음 같아서는 현관까지 날려버리고 싶었지만. 소란을 벌이기엔 다소 나른했다. 이런 나른함은 간만에 느껴서 왠지 기묘했다. 꿈에서 쌀밥 잔뜩 먹었는데도 현실에서는 힘이 없다. 역시 꿈속의 밥은 가짜 밥이었나 보다. 나의 저항에 짐짓 밀려나가 준 제노스는 빙긋이 웃고 있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아침 아닌 거 알아.”

 “그렇네요.”


 제노스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가까이 와서 입 맞췄다. 그리고 제노스는 내 귓가에도 키스했다. 간지러워서 목을 움츠렸더니 제노스는 반대편 귀에도 똑같은 짓을 했다. 따뜻한 제노스의 입술이 귓불을 문지르고 쪽쪽 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그래서 나는 반대편도 움츠렸다. 이런 무의미하고 반복적인 행위, 어째서 제노스는 계속 시도하는지 알 수 없다. 비몽사몽 하고 있는 와중에 간지럽고 뜨듯하고 물컹한 게 귀 여기저기에 닿아오니까 다리에 힘이 풀리고 더욱 일어나고 싶지 않아졌다. 그런데 어디선가 익숙하고 달콤한 향기가 났다. 문득 제정신이 들었다.


 “밥 지었습니다.”


 내가 쌀밥을 먹은 꿈을 꾼 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 자는 동안 밥 냄새를 맡은 신체는 밥을 먹는 꿈을 꾼 것이다. 인간의 뇌는 멍청하리만치 정직하다. TV를 틀어둔 채로 자면, TV속의 등장인물들을 만나는 꿈을 꾸듯이. 


 “배고파.”

 “생선튀김과 가지조림 만들어두었습니다.”


 상체를 일으켰다. 끙 소리가 절로 났다. 아직도 아랫도리가 뻐근했다. 당연하다. 어젯밤 제노스의 그것이 내 엉덩이 사이를 왔다 갔다 했었다. 바로 이 방에서 몸 겹쳤다. 자꾸 회상하기 싫었지만 솔직히 그동안 동정으로 인생을 보내왔는지라, 어젯밤의 희한한 경험 자꾸만 떠올리게 된다. 충동적인 나 자신이 한심해서 얼굴을 찌푸렸다. 제노스는 어디서 났는지 우리 집에 없던 식기에 음식을 담아왔다. 네모난 나무 정식 식판에 매화가 그려진 식기들이었다. 우리 집 TV보다 저 식기 세트가 더 비쌀 것 같다는 직감이 온다. 돈을 저리 많이 쓰는 것도 재능이다. 나는 누군가 돈을 쥐어주고 질 좋은 그릇을 사오라고 시켜도 양심 상 저렇게 못한다. 


 “이불 거두지 않고 드시겠습니까.”

 “응.”


 제노스는 내 옆에 꿇어앉더니, 주섬주섬 수저를 챙겨들었다. 뭐 하려는 건지 물끄러미 쳐다봤더니 제노스는 환자 대하듯이 밥을 한 술 떠서 내 코앞에 갖다댔다.


 “...뭐냐.”

 “밥입니다.”

 “그걸 물어본 게 아니잖아.”


 내가 혐오의 빛을 띄운 채 제노스를 노려보자 제노스는 조금 당황했다. 그리고 곧 뭔가 깨달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제노스가 나에게 숟가락을 건네줄 줄 알았는데, 이내 제노스는 밥을 입김으로 후 후 불기 시작했다. 아니 식혀달라는 뜻이 아닌데. 


 “단지 선생님을 편하게 해 드리고 싶어서요.”

 “몸은 편하더라도 마음이 엄청 불편하거든.”


 제노스는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수줍어하실 필요 없습니다. 라고 한 마디를 더했다. 아니 귓구멍이 있으면 사람 말을 제대로 좀 들어...


 “생선부터 드시겠습니까?”

 “숟가락 달라고.”

 “알겠습니다.”


 숟가락을 전해 받은 나는 밥을 입에 우겨넣었다. 밥은 더럽게 맛있었다. 따뜻하고 달았다. 식기를 무릎에 두고 밥을 두어 번 더 떠먹었다. 나는 된장국을 떠먹으려다가, 내 손이 덜덜 떨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정말 손을 떨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내 의지와 상관없이 손이 벌벌 떨렸다. 왜인지는 나도 모른다. 된장국이 이불에 몇 방울 툭툭 떨어졌다. 나는 어색하게 국을 마셨다. 그리고 이번에는 손을 떨지 않으려고 힘을 주어서 생선도 집어 들었다. 이번에는 힘을 너무 많이 주어서인지 생선이 가루처럼 부스러져서 바지로 떨어졌다. 


 쇠 젓가락도 내가 힘 조절을 하지 못해선지 휘어버렸다. 구부러진 젓가락을 상 위로 내려놓았더니 젓가락은 초능력 쇼를 위해 낭비된 것처럼 곡선이 되어 나뒹굴었다. 열을 가해서 녹인 것처럼 멋진 모양새였다. 제노스는 그 모습을 보면서 명료한 발음으로 상황 정리발언을 했다.


 “일반인의 경우. 과로한 다음날은 힘이 현저히 줄어듭니다만.”

 “...”

 “선생님의 경우, 워낙에 기본 에너지가 어마어마하다보니, 오히려 과로 뒤에 힘 조절이 되지를 않아서. 일상생활 중에 간헐적으로 힘이 폭주하셨습니다.”

 “...”

 “그래서 제가 밥 직접 먹여드리곤 했습니다.”


 나는 왠지 할 말이 없어졌다. 굳이 고집을 부려서 손으로 먹자니, 그건 유인원 같을지도 모른다. 유인원도 영장류에 속하긴 하지만 나는 되도록 인간 축에 들고 싶다. 왠지 문명으로부터 동떨어진 자의 슬픈 기분이 되었다.


 “먹여드릴까요.”

 “그래.”


 제노스는 나의 어쩔 수 없는 선택에 기뻐하는 것 같다. 제 뜻대로 되어서 좋다는 듯 또 빙긋 웃고 있다. 내 제자는 최근 내가 불행하면 기뻐한다. 저 자식, 남의 불행이 즐거움이 된 시점에서 이미 히어로 자격 박탈 아닌가. 그래도 밥이 맛있어서 참았다. 밥을 한 숟갈 한 숟갈 받아먹는데 먹여주는 제노스 쪽이 상당히 숙달되어 있어서 별로 불편하지 않았다. 된장국을 입가로 조금 흘릴 뻔 했는데 순식간에 수건으로 찍어 닦아내기까지 했다. 보통 이유식을 저렇게 먹이지 않던가. 25세 건장한 사내의 육신은 죄책감에 소름이 돋았다.


 “원래는 야채 죽을 끓이려고 했습니다만.”

 “죽 먹고 싶었는데.”

 “좋은 쌀이 있기에, 죽을 끓이기엔 좀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생선튀김과 가지 조림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간도 적당하고 맛있었기 때문이다. 이대로라면 팔아도 손색없다. 밥은 꾸준히 줄어들었다. 


 “다 드셨군요.”

 “그렇네.”


 오랜 시간에 걸쳐서 밥을 다 먹었다. 남의 손으로 밥을 받아먹는 일은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민망하기도 하고. 


 “선생님의 입, 예쁜 모양으로 움직입니다.”


 제노스는 내 입에 짧게 입을 맞췄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내추럴하게 밥 먹이다 이런 짓을 한다. 아니 저 미친 놈. 단지 기가 막혀서 침묵했다. 그리고 이젠 화내기도 좀 귀찮아서 마음속으로만 화냈다. 이 귀찮은 기분을 쭉 이어나가다가 키스 받는 습관 들어버리면, 나중엔 화조차 안 날지도 모른다. 진짜 그렇게 되면 안 될 텐데. 영 불안해진다. 제노스는 주섬주섬 식기를 정리하더니 부엌으로 갔다. 식사를 해치우고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니 이미 해는 힘을 잃고 있었다. 하루가 이렇게나 어영부영 끝났다. 오늘 첫 끼를 먹자마자 나의 소중한 하루가 삭제됐음을 창가 너머로 보이는 노을에게 통보받았다. 멍한 기분이 됐다.


 제노스가 설거지를 하면서 이런저런 정담을 걸어오기에 대답을 해 주기 싫은 나는 TV를 켰다. 제노스는 그래도 풀 죽지 않았다. 놈은 어젯밤 이후 자기는 아직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을 가져버린 것 같다. 글쎄... 절대 다시 좋아하게 됐다거나 그런 거 아니지만. 맘대로 착각하라고 내버려둔다. 내가 못된 말을 하거나 좋아해주지 않는다고 해서 나를 포기할 녀석이 아니란 걸 깨달았다.


 TV에는 저녁시간대에 하는 드라마가 방영되고 있었다. 별로 재미없을 것 같아서 채널을 돌렸더니 뉴스채널이 있다. 무난하게 볼만해서 그냥 틀어두었다. 뉴스에는 무테안경을 쓴 아나운서가 소식을 전했다. 저 사람은 안경을 지나치게 깨끗하게 닦아서 신경 쓰인다. 무테안경을 저렇게나 깨끗이 닦으니까 안경을 쓴 것 같지 않고, 콧등과 관자놀이에 은빛 직선만 반짝거리는 느낌이다. 기분이 묘해진다. 안경 관련해서 잡생각을 하고 있는데 아나운서는 뜻밖의 소식을 전했다.


 “제노스 특집 2회가 기획되었습니다.”

 “...”

 “...”


 제노스도 나도 말이 없었다. 심지어 제노스는 얼굴에 약간 그늘이 졌다. 내 인생의 새로운 재미가 추가된 것 같다. 나는 지난 1회를 재미있게 봤기 때문에 2회도 매우 기대가 됐다. 제노스의 여자친구 역할을 맡은 그 아이돌, 인지도 훨씬 좋아졌던데 또 출연하는 걸까.


 “...귀찮게 굴기에 협회 디너파티는 취재해도 좋다고 했을 뿐입니다.”

 “히어로협회에 디너파티도 있었어?”

 “스폰서들이 가끔 주최합니다.”

 “그렇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S급 이외 등급의 히어로는 모르는 많은 일들이 협회 중심부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치사하다는 생각도 들고, 뭐 당연한가 싶기도 하다.


 “선생님. 되도록 방송 2회 보지 말아주세요.”

 “보고 싶은데. 내 얘기기도 하고.”

 “첫 회분 쓰레기 같았습니다.”

 “쓰레기 같은 점이 특히 재미있던데.”


 제노스는 설거지를 마치고 오더니 내 옆에 얌전히 꿇어앉았다. 꽤나 얼굴에는 수심이 깊어 보였다. 이 장소에는 절벽이고 뭐고 없었지만, 현재 제노스의 표정은 절벽에서 뛰어내릴까 고민하는 남자의 표정과 흡사했다. 나는 벽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조금 웃었다. 


 “역시 사건당일, 남은 기력으로 방송국 부쉈어야 했습니다.”

 “너 범죄자 될 텐데.”

 “방송국 쓰레기들이 이미 범죄자입니다.”

 

 제노스의 제대로 신랄한 표현이 왠지 웃겼다. 그래서 이번에는 벽 쪽으로 고개도 안 돌린 채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어버렸다. 그러자 제노스는 절벽에서 뛰어내릴 결심을 마치고 신발 한 쌍을 잘 벗어둔 남자의 표정이 되었다. 


 지금껏 텐션 미묘하게 바뀐 애인모드 제노스에게 당해오기만 했는데, 드디어 한 방 먹인 기분이 되었다. 하지만 나는 어리석게 여기서 만족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승부사가 있는 사람이다. 나는 약간 공황상태인 제노스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있잖아.” 

 “...네?”

 “그, 너도 약속노트 조항 어기지 않았냐.”

 “...제가 말입니까?”

 “자살하려고 했었잖아.”


 나는 아직도 책상 위에 있는 노트를 들어서 제노스 앞에 펼쳐주었다. 제노스는 얼빠진 표정이다.


 “여기 보면 말야, 분명 다쳐오지 않는다는 조항 있거든.”

 “...”

 “...”

 “...그렇네요.”

 “너 여러번 다쳐왔었지?”

 “...하...”


 제노스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번졌다. 곧 한숨소리를 내며 이리저리 표정이 일그러졌다가 안절부절 못 하는 꼴을 보니 나는 즐거워졌다. 


 제노스는 약간 호흡까지 가쁘게 바뀌었다. 너무 당황스러워서 어찌할 도리를 모르는 거겠지. 나는 싱글싱글 웃으면서 그를 관찰했다. 제노스는 본인 이마에 손을 올리고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머리카락이 치워지고 이마가 드러난 제노스의 표정은 평소답지 않게 무척이나 바보 같은 표정이었다. 넋이 나가 있었다. 나는 제자를 더 놀려줄 요량으로 그의 맞은편에 앉아서 패널티는 뭘로 할까, 라고 한 마디 더 이죽거려 주었다. 그러자 제노스는 고개를 푹 숙였다.


 제노스는 한동안 고개를 들지 않았다. 나는 제노스가 좌절해서 고개를 숙인 줄 알았다. 그래서 기뻤다. 더 놀려주려고 제노스의 고개 아래를 살짝 훔쳐보았다. 그러나 제노스는 웃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


 이번에는 내가 얼이 빠져서 약간 뒤로 물러났다.


 “당신의 연인으로서, 앞으로 절대 다치지 않겠습니다.”

 “...?”

 “벌주세요.”


 제노스는 나를 꽉 끌어안아왔다. 황당한 나머지 참신한 욕설조차 생각나지 않았다. 지금 힘 조절을 할 수 없는 내가 움직이면 제노스 폭발한다던지, 팔 끊어질까봐 그냥 가만히 있었다. 그랬더니 얼굴에 키스가 쏟아졌다. 귀찮아 죽을 것 같다. 


 오늘도 제노스 한 방 먹이려다 오히려 기쁘게 해 버렸다. 하필이면 상대가 제노스라서 실망시키기가 쉽지가 않다. 내 나름의 아무리 실망스러운 이야기를 해도 실망해주질 않는다. 


 "딱히 걱정한 것 아닌데."

 “노트의 내용 기억해주신 것만으로도 기쁩니다.”

 “기억했다기보다는 그냥 찾아봤어.”

 “찾아보셨습니까, 기뻐서 큰일이네요.”


 숨을 몰아쉰 뒤 제노스가 입맞춰왔다. 내가 반박하려고 준비해두던 말은 제노스의 입술 사이로 뭉그러져서 사라졌다. 현재 내 상태는 조금만 힘 줘도 쇠 젓가락이 구부러지는 형편이라, 제노스를 저지할 수 없었다. 성가셔도 그냥 내버려두는 수밖에. 


 “좋아합니다.”


 제노스가 입을 맞춰오기에 입을 벌려주지 않았다. 키스에 응해주지 않겠다는 뜻이었는데 별로 상관없는지, 나의 다문 입에 어린애뽀뽀 같은 짧은 키스를 연달아 해댔다. 


 “...저는 아무래도 당신이 좋습니다.”

 “야. 키스하지 마. 팔 부순다?”

 “먼저 키스해오던 옛날의 선생님도, 지금의 키스하면 화내는 선생님도 좋습니다.”

 “...”


 나는 그 고백에 너무 당황해서 입을 무심코 벌렸나보다. 지금 이렇게 제노스의 물컹한 혀가 내 입 안에 들어와 있는 걸 보면 그렇다. 뻔뻔스럽게도 이렇게나 버젓이 들어와서 내 입 안 공간 맛보고 있다. 어제도 그렇게 지겹게 섞은 혀인데, 새삼스럽게 또 섞는 이유를 모르겠다. 질리지도 않는 건가.


 질척질척 우리의 혀가 섞였다. 나는 썩 키스하고 싶은 기분은 아니었는데 제노스가 너무 열렬하니까 멈추는 타이밍을 잡지 못했다. 나는 스르르 몸이 뒤로 넘어갔다. 결국 원룸의 천장이 보인다. 츕츕 하고 말도 안 되게 질척하고 이상한 소리도 난다. 제노스의 혀는 우리 둘의 앞니가 부딪히는 것에도 개의치 않고 내 입속을 마구 돌아다녔다. 키스 때문에 침이 새서 볼로 흉하게 질질 흐르는 중이다. 그런데도 제노스는 계속 키스했다. 역시 이 녀석 팔 부술까. 파츠 많은 것 같던데.


 “...하아?”


 나는 제노스의 팔을 뜯으려고 했는데, 방향감 미스였는지 제노스의 상의를 뜯어내버렸다. 키스에 거칠어진 숨을 고르며 내 손을 보자, 제노스의 상의의 천이 내가 움켜쥔 모양대로 뜯겨져서 일부 들려 있었다.


 “독촉하지 않으셔도 알아서 벗습니다.”


 제노스는 심각한 표정으로 농담을 해왔다. 그리고 침착하고 진지하게 상의를 벗었다. 아니, 너는 정말 농담 안 어울리는 마스크 가졌으니까 농담 시도하지 좀 마...


 “키스만 합니다."


 그러더니 제노스는 정말로 키스만 했다. 숨이 모자랄 정도로 키스만 했다. 나는 어젯밤에 내 인생 최초의 키스를 경험했다. 어젯밤에 원리를 알게 된 행위, 하루아침에 적응될 리가 없다. 반면 상대는 나와의 키스가 익숙한데다 학습능력이 우수한 사이보그라서 야하고 숙련도가 높은 키스를 한다. 


 키스할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제노스는 나를 많이 사랑한다. 추측도 아니고 그냥 이젠 사실이다. 방어기제로 애써 의심해보려 해도 의심이 안 된다. 이런 절박한 키스는 내 평생에 다른 누군가에게 받아볼 이유가 없는 키스다. 지구가 아무리 넓다한들 대머리에 주로 츄리닝복장인 나를 이렇게까지 좋아할 인간이 있을 리 만무하다. 제노스는 키스를 할 때 자기에겐 나뿐이라고 요란하게 호소하는 것 같다. 평소엔 저 녀석이 날 좋아한다는 사실이 좀 징그럽게 느껴지는데, 입을 맞추면 제노스의 마음이 대략 전해져 와서 그 징그러움을 잊게 될 정도다. 


 키스는 생각보다 길게 이어졌다. 나는 밑이 또 섰다. 어제 여러 번 세웠고 별 난리를 다 했던 물건인데, 잠 좀 자서 회복했다고 도로 서는 걸 보면 나도 아직 20대인 것인지. 거의 머쓱할 지경이 됐다.


 “...만져드릴까요.”

 “시끄러, 또 하면 힘들어.”

 “이걸 그냥 내버려두는 편도 나름대로 힘듭니다.”

 “아, 죽어....!! 정말...”


 나는 패널티도 아닌데 또 입술 겹치고 있는 상황이 너무 억울하고 열받는 나머지 고등학생 남자애처럼 원초적인 욕설을 뱉어버렸다. 숨 막히는 키스로 인한 생리적인 눈물도 좀 고였다. 제노스는 쿡쿡 웃었다.


 “귀엽습니다.”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너무너무 짜증났지만, 시야를 가리고 있는 눈물을 박박 닦아내느라 반박을 하지 못했다.


 “또 우시는 걸까.”

 “아닌데. 짜증나네.”


 나는 진짜 나쁜 말 했는데 제노스에게는 어째 정담으로도 들리는지, 표정에 썩 데미지가 없어 보인다. 오히려 여유가 넘친다. 나는 그다지 남의 눈빛 멋대로 해석하는 취미는 없으나, 지금 제노스의 눈은 오로지 나만을 사랑한다는 눈빛으로 보고 있다. 


 놈은 키스도 키스지만 눈빛이 더 괴상하다. 안광은 전기 따위로 유지되는 주제에 좋아한다는 의사를 담은 눈빛을 보낼 수 있다. 그의 눈동자 안에는 나만 들어가 있다. 괴상하다. 이렇게까지 나를 좋아하는 저 애가 괴상해. 내가 저 녀석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도 나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 정말이지 희한하다. 


 “만져드리겠습니다.”

 “아, 앗.”

 “넣는 건 포기하죠. 어제 무리하셨잖습니까?”


 제노스는 내 기둥을 만지작거렸다. 언제 내 바지를 내렸는지는 모를 일이다. 키스에 정신없을 때를 틈타 내렸나 싶다.


 “혼자 식힐 거야.”

 “봐도 되나요.”

 “아니.”


 단박에 묻길래 나도 단박에 거절했다. 그리고 나는 화장실로 도망쳤다. 원룸이라 도망을 가도 멀리 못가는 점이 소소하게 치욕스럽다. 


 화장실 안에 오니 갑자기 현실감이 닥쳐왔다. 나는 제노스랑 데이트 뒤에 섹스했고 다음날 밥 먹고 또 키스했다. 왠지 착실하게 연인의 행위 다 해내고 있다. 아랫도리는 아직 반쯤 서 있다. 자위하면 자위하는 소리 날까봐 걱정하다가 텅 빈 욕조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알아서 식을 때까지 그냥 앉아있었다. 로션이 든 바구니가 눈에 띄었다. 로션 바구니 안에는 귀퉁이가 축축하게 젖은 히어로 잡지가 보였다. 자연스럽게 꺼내 펼쳤다. 다행히 히어로 잡지의 탱크톱 사나이들 특집 보자마자 아랫도리는 빠르게 식었다. 





-





 고등학교 때의 나를 떠올려보면, 중학교 때의 상황과 많이 다르지 않다. 고등학생 때의 나는 중학교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무성한 흑발과 무표정을 가진 남자아이였다. 단지 몸의 전체적인 사이즈만 위와 양옆으로 불어난 상태였다. 미미하게나마 뼈도 굵어졌으리라 생각한다. 내면도 딱히 비약적인 성장은 없었다. 세상이 얼마나 불합리한지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알게 되어서 어른들에게 질문을 하는 횟수가 줄어들었을 뿐이다.


 빼빼로 데이가 되면 학교가 아침부터 시끄러웠다. 으레 텅 비어있어야 할 누군가의 책상과 사물함은 초콜릿이 배달되어 있었다. 초콜릿과 빼빼로가 쇼핑백에 가득 찰 정도로 잔뜩 받는 녀석도 있었다. 우정 빼빼로를 포함한다고 쳐도 많은 수준이다. 물론 그렇게까지 인기 있는 녀석들은 소수다. 전형적으로 반반한 얼굴에 성격이 활발해 인기가 있는 타입이 그랬다.


 고등학교 2학년인 내가 신발장을 열었을 때, 신발장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당연하다고 생각해서 실망도 하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조차 없었다. 매년 이래왔기 때문에 나는 별 생각이 없었다. 인간이다 보니 공짜 과자를 먹는 녀석들이 부러운 마음은 있었다. 하지만 놈들은 인기 때문에 나름대로의 피곤한 인생을 살고 있으므로 그다지 사무치게 부러운 수준은 아니었다.


 영어사전을 꺼내려고 사물함을 열었을 때에도 아무것도 없었다. 이번에도 당연하다고 생각해서 실망하지 않았다. 나뿐만 아니라 클라스의 대부분의 남자아이들이 나랑 똑같은 처지다. 발렌타인 데이라던지 화이트데이, 등등의 기념일은 인기 상위 10%인 녀석들의 축제이니까. 나는 신경 쓰지 않는다.


 하지만 마음이 약간 쓸쓸해진 건 인간이기 때문에 당연했다. 그냥 마음이 축축했다. 창 밖을 보니 조금 눈발이 날렸다. 우산을 써야 할 정도는 아니었고 그냥 잔잔한 눈발이었다. 하늘이 미지근한 회색이다. 기억력이 좋지 않은 내가 왜 당시의 날씨를 기억하느냐면, 영어사전을 들고 내 자리에 돌아와 의자에 앉았을 때 그 사건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우두둑.


 뭔가 엉덩이에 걸렸다. 일어나서 보니 처참하게 산산조각이 난 빼빼로가 있었다. 내가 깔고 앉은 거다. 누군가 두고 간 것이다. 내 이름도 적혀있었다. 사이타마 군에게. 이왕 줄 거면 잘 보이도록 책상 위에 올려둘 것이지, 왜 의자에 올려뒀을까. 아마도 선물의 주인은 소심한 타입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나는 내 생에 첫 빼빼로 선물을 내 엉덩이로 분쇄해버린 사실이 황당했다. 원형 그대로를 받았으면 좋았을걸. 나는 조각난 과자 부스러기를 입에 털어 넣었다. 맛이 있지는 않았다. 그냥 초콜릿과 계란과자 맛이었다. 하지만 마음은 흡족했다. 누군가가 나에게 호감이 있다는 뜻이다. 그 날은 그 과자에 대해 하루 종일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는 다 잊어버렸다.

 

 하지만 그 날 이후로 난, 학교에 날 좋아하는 존재가 있다는 것은 그 사실 자체만으로도 꽤 행복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누군가가 나를 좋아해준다는 사실은 고교생활 내내 나를 지탱했다. 이동수업시간에 혼자 남겨진 어느 날에도 별로 외롭지 않았다. 나는 무너지지 않았다.

 

 

 

 

 나의 남색 인생은 그날 이후로 끄트머리가 조금 더 맑은 하늘빛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선지 중학교 때보다 고등학교 때의 생활이 한결 수월했다.

 

 누군가가 나를 좋아한다는 사실은 역시 위안이 된다. 그렇게 위안이 된다는 이유만으로 나는 제노스를 내버려두고 있었던걸까. 아니면 정말로 좋아했던 걸까.






-







 겨울의 새벽 밤거리는 적막했다. 가로등 옆의 벤치에 앉자 벤치가 삐걱거렸다. 내 골반 뼈도 벤치와 같은 박자로 삐걱거리기에 앉자마자 나직이 숨을 삼켰다. 전투의 후유증조차 남지 않는 내가 신체적 외상이 남아본 건 처음이다. 나는 오늘 밤은 영 잠이 오지 않아서 제노스를 두고 혼자 외출했다. 마음이 심란하다. 제노스에게 자선을 베풀듯 충동적으로 몸을 맡기지 말았어야 했다. 


 내 성격의 고질적인 문제점 중 하나가 바로 돌발행동이다. 연민까진 아니어도 걱정되는 대상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약해져서, 내 능력으로 감당하지 못할 짓을 문득 저질러버린다. 턱이 갈라진 꼬마 때도 그랬다. 내가 초면의 그 꼬마를 귀엽게 볼 리 없다. 목숨을 걸고 괴인에게 뛰어든 건 그 아이를 그냥 내버려두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에서였다. 단지 그뿐이었다. 내 자신조차 놀라웠다. 


 충동적으로 제자와 섹스한 뒤, 나는 이 경험이 나의 첫 경험이 아니라는 걸 육체의 기억으로 깨달았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난 줄곧 제노스가 나를 속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내심 의심해왔었다. 그러나 별 것 아닌 키스에도 좋다고 헐떡대는 내 육체 때문에 그 가설이 무너졌다. 충격적이다. 


 내 입김이 자욱하게 끼쳐 올라가는 검은 밤하늘에는 별이 무성했다. 저 많은 별들은 내 모근이 하나하나 죽어 만들어진 별자리일지도 모른다. 안 그래도 잠이 오지 않았는데 그렇게 생각하니 화나서 정신이 더 맑아진다. 


 편의점에 들를 기분도 영 아니었다. 그냥 이렇게 멍하니 있으면서 밖에서 머리를 식히고 싶다. 평소라면 이불의 섬유유연제 냄새에 몽롱해져 자고 있었을 시간인데, 나는 오늘 낮 내내 곯아떨어졌었고, 그 때문에 낮밤이 바뀌어버렸는지 잠이 오지 않았다. 새벽에 홀로 밖에 나와 있는데도 전혀 무섭지가 않았다. 나는 강하기 때문이다. 인생이 시시할 정도로.


 한동안 어둠을 만끽하고 있었는데, 주머니에 들어있는지도 몰랐던 휴대폰이 울렸다. 배터리는 어째선지 가득 차 있었다. 내가 외출하기 전에 제노스가 넣어둔 것 같다. 왜냐하면 수신된 것은 제노스의 문자였다. 이 녀석, 보통 한번 자면 쭈욱 자는 편인데 어쩐 일인지 용케 깼나보다. 제노스는 내가 기억을 잃은 이후로 한 번도 문자를 하지 않았는데.



 [어디에 계십니까]

 02:40

 

 [산책]

 02:42


 [선생님은 제가 싫어지셨나요]

 02:42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제노스는 내가 사라지자 자기가 싫어졌는지에 대해 걱정을 하는 것 같다. 내가 가출이라도 했다고 생각하는 걸까. 나는 제노스처럼 불쑥 감정적인 가출을 하는 타입이 아니다. 딱히 그럴 감정 자체가 없다. 제노스는 나의 감수성을 과대평가 해주는 것 같다. 예전의 나는 제노스에게 서운한 일이 있으면 토라지기도 했었을까. 그리고 그건 과연 나였을까. 만일 과거의 내가 토라졌다면, 제노스를 사랑하니까 토라졌을 것이다. 나는 인생에서 누군가에게 그렇게나 대단히 서운해서 토라진 기억이 없다. 그냥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이는 편이었다.




 [의미 없는 산책이야]

 02:43


 [머리를 식힐 시간이 필요할 정도로 어제 일 싫으셨습니까]

 02:44


 [싫지 않았어]

 02:45


 [싫지 않았습니까]

 02:45


 [그래]

 02:45


 [다행이네요]

 02:46


 [다만 우리가 정말 사귀었다는 걸 깨달았다]

 02:46


 [저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02:46


 [미안. 의심했다]

 02:48


 [미안해하실 필요 없습니다. 무리한 것을 강요해서 죄송합니다]

 02:48




 제노스는 사과를 해 왔다. 갑자기 서로에게 미안하다고 맞절을 하는 꼴이 됐다. 이런 거 불편하다. 조금 미간을 찌푸렸다. 나는 잠시 제노스에 대해 궁금해졌다. 나는 친해진다고 해서 무언가 얻어질 게 없는 사람이다. 전투력이 강하긴 해도, 제노스에게 달리 가르치는 게 없다. 그냥 나는 강함 그 자체일 뿐이다. 


 중학생 때의 내가 떠오른다. 나와 친해져서 저들이 얻을 게 없다는 걸 나 스스로도 인정했고 나와 친하게 지내주지 않는 것은 반 아이들의 자율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친구를 만들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그냥 내버려뒀다. 고등학교 때도 그랬다. 처음 1~2년은 괴로울 때도 있었지만 십여년을 채우니 모든 일에 그러려니 하게 되었다. 



 [제노스. 나를 좋아해?]

 02:49


 [네]

 02:49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답장이 왔다. 전송 버튼을 누름과 동시에 답신을 받은 것으로 착각했을 정도다. 제노스는 나를 좋아한다. 이상한 자식이다. 그래서, 제노스는, 나에게, 뭘, 바라는거지? 느린 타자로 물었다.



 [내가 왜 좋아?]

 02:51




 이번에는 답신이 빠르게 오지 않았다. 나는 한동안 기다렸다. 놀랍게도 제노스는 1시간이 넘게 답신을 보내지 않았다. 잠든 걸까. 잠들었다면 기다리지 않는 편이 좋다. 




 [좋아하는데 이유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만]

 04:02


 [여쭤보시면 그 이유를 만들어야 하니까 만들었습니다]

 04:03


 [20자보다 길어질 것 같습니다]

 04:03



 나는 모든 문자를 읽어보고 조금 목이 메여왔다. 그것과는 별개로 문자메일 송신 요금이 신경쓰였다. 그렇게 답장을 하려는데 줄줄이 제자의 메일이 이어져서 안 그래도 느린 손으로는 답장을 할 수가 없었다.




 [저는 선생님을 좋아합니다]

 04:03


 [이를테면 지금의 상황을 의심해서 물어보는 당신이 좋습니다]

 04:03


 [사랑받지 못한다는 확신 가지고 살아온 점이라던지]

 04:04



 [저의 인생은 이상한 적 없는 인생입니다]

 04:05


 

 [습격당해 몸을 개조한 것이 일생일대의 이상한 사건이었습니다]

 04:06


 [나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로 누군가를 좋아해본 적 없습니다]

 04:06


 [선생님을 사랑하는 제가 이상합니다]

 04:07


 [이상하네요]

 04:07



 [어린애처럼 아이스크림을 아껴먹는 선생님이 좋습니다]

 04:07


 [조그마한 덩어리 이틀씩이나 나누어 먹는 모습 좋아합니다]

 04:07

 

 [벽에 기대서 TV를 보는 선생님이 좋습니다]

 04:08


 [자신이 지켜낸 도시 전경이 나오는 뉴스를 보는 당신이 좋습니다]

 04:08


 [선생님이 대단한 사람임을 몰라주는 이 도시인데도]

 04:09


 

 


 

 [슬리퍼 바람으로 빨래를 너는 선생님이 좋습니다]

 04:10


 [제 옷의 냄새를 맡아보는 모습]

 04:11


 [저는 체향이랄 것 없지만 들켜서 선생님은 민망한 표정 지었습니다]

 04:11

 

 [역시 선생님도 저를 좋아하셨습니다]

 04:12


 [선생님, 저를 기억하시나요]

 04:12


 [제노스입니다]

 04:13


 [실은 알아주시는 것 이젠 필요 없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04:14


 [앞으로는 저만이라도 계속 선생님을 좋아합니다]

 04:14


 

 


 

 [괴인에게 묘하게 모질지 않은 모습 좋아합니다]

 04:15


 [대체로 죽여버리지만]

 04:15


 [죽여버리는 점도 포함해서 좋아합니다]

 04:16


 [선생님이 가진 나름의 괴인을 죽이는 기준을 좋아합니다]

 04:16

 

 

 

 

 


 [슈퍼가 습격당했다는 소문 듣고 묘하게 풀죽은 모습 좋아합니다]

 04:17


 [섹스 도중에 결합부위 신기하다는 듯 어루만져보는 선생님 좋아합니다]

 04:17


 [쭈그리고 앉아 장화 신는 뒷모습 좋아합니다]

 04:18


 [선생님 귀엽습니다]

 04:18


 [몸에서 붉은 자국 발견하면 따져 묻는 표정 좋아합니다]

 04:18


 [다시 생각해봐도 그건 모기입니다]

 04:18


 [기분 좋은 날엔 계단을 2칸씩 올라가는 모습 좋아합니다]

 04:18


 [트렁크 차림으로 엎드려서 잡지 읽는 모습 좋아합니다]

 04:19


 [선풍기랑 가까이 마주보고 앉은 모습 좋아합니다]

 04:19


 [입 맞추면 귀찮아하는 표정도 좋아합니다]

 04:19

 

 

 

 

 


 [소동물과 친하지 않으면서 마주치면 안절부절 맴도는 모습 귀엽습니다]

 04:20


 [괴인은 철퍽철퍽 주먹으로 잘 부수시면서 소동물 취급은 좀 다릅니다]

 04:20


 [그래서 우리 고양이 키울까요, 라고 물어보려 했습니다]

 04:20


 [저는 강아지라도 상관없습니다]

 04:20


 [항상 말을 꺼낼 기회를 보고 있었는데 쉽지 않았습니다]

 04:21


 [카레를 끓이면서 오늘에야말로 물어보자고 생각했었어요]

 04:21

 

 


 

 [이젠 선생님이 고양이 파인지 강아지 파인지 알 수 없게 되었네요]

 04:21


 [알았다면 좋았을텐데]

 04:22


 [그래도 저는 당신을 만나지 않은 것보다 만난 것이 더 행복합니다]

 04:22


 [그렇게 생각하면 슬프지 않습니다]

 04:22


 [함께 있으니까 괴롭지만 행복합니다]

 04:22


 [좋아하는 마음이란 건 역시 이상하네요]

 04:23


 [이런 마음 처음이라서 설명하자니 잘 모르겠습니다]

 04:23


 [죄송합니다]

 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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