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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노사이] 카레를 엎은 날 6 
작성일시 : 2016. 2. 7. 04:31 | 분류 : 장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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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 라던지 후식 먹을까요.”

 “아니...”


 라면집을 나온 나와 제노스는 시내 방향으로 걸었다. 제노스에게 뭔가 계획이 있어보여서 나는 그걸 따라 걷는 중이다. 


 “평소 우리가 했던 대로 데이트 합니다.”

 “대체로 뭐 했었는데?”

 “그냥 밥 먹고 이런저런 얘기 하고. 다른 연인들과 똑같았습니다.”


 제노스는 생각보다 내게 많은 것을 요구하진 않았다. 나는 점퍼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걷고 있었는데 제노스가 내 주머니에 손을 넣어왔다.


 “뭐 하는거야?”

 “평소에 하던 짓이요.”

 “하지 마.”


 나는 제노스의 손을 툭 쳐서 떨어뜨렸다. 내 손 잡고 있게 내버려 두기에는 녀석의 손이 너무 차가웠다. 무슨 소재로 만들었는지는 자세히 모르겠지만, 어쨌든 금속이니까 차갑다.


 “기억을 잃기 전의 선생님도 손은 못 잡게 하셨었습니다.”

 “당연하지, 겨울이라 네 손 무지 차갑다고.”

 “네. 똑같은 말 하셨습니다.”


 제노스는 똑같은 시도를 해 놓고 같은 사람에게 여러 번 거절당하는 취미라도 있는가보다. 뭐지. 자기학대를 좋아하나. 전투에서 매일 깨져서 돌아오는 걸 보면 이 가설 약간 납득이 간다.


 “그 때마다 저는 다시 잡았습니다.”

 “으악. 차가워.”


 제노스는 내 손을 다시 잡아왔다. 이 자식 정말 뻔뻔하다. 능글맞아졌다. 한 대 치고 싶지만 참아야한다. 왜냐하면 나는 일주일 전 병원에서 제노스에게 뭔가 잘못했다. 내가 뭘 잘못했는지는 영 모르겠지만 아무튼 크게 잘못한 상황이 됐다. 그렇게나 나와 함께 있기를 좋아하던 제노스가 한동안 가출했을 정도니까. 얼마나 상심했냐면 집 나가서 자살시도 하다가 겨우 마음 고쳐먹고 갱생했을 정도다. 스스로 마음 고쳐먹는 부분은 꽤 드라마틱하다. 


 “배도 채웠으니, 운동할까요.”

 “운동?”

 “고스트타운은 언제나 괴인이 가득하니까요.”

 “엥? 데이트라며.” 

 “우리는 전부터 데이트 중에도 괴인 많이 잡았습니다.”

 “아, 정말... 우리답네...”


 나는 왠지 과거의 우리가 한 짓이 웃겨서 웃음이 나왔다. 데이트 하겠답시고 나와선 괴인을 때려잡았다니. 공익을 추구하는 커플이었군. 이런 식으로 계속 데이트하며 1주년 채웠으면 협회에서 표창장이라도 더블로 줬을 것 같다.


 “지금 우리는 평상복이니 피 안 튀는 녀석 잡죠.”

 “그래. 세탁 귀찮고.”


 고스트타운을 지나가는데 좀도둑처럼 생긴 작은 괴인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우리 이 일대에서 유명한가.


 “그냥 모습만 비춰도 도망가네.”

 “네. 줄곧 데이트 코스였으니까요.”

 “이 정도로 설설 기는 괴인들은 좀 안됐는데.”

 “언젠가 저희도 그런 결론을 내리고, 정말 위험한 녀석들만 잡았습니다.”


 과거의 나와 제노스는 공익적이면서 자비롭기까지 했다. 아 정말, 협회 놈들. 표창장 달라니까. 내가 몰라서 그렇지. 이미 줬을지도 모른다. 집에 가면 서랍을 잘 뒤져보자.


 “안녕하십니까!”


 큰 목소리로 우렁차게 인사해오는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려보니 검은 옷을 입은 조직이 있었다. 후부키 그룹이다. 실적을 올리기 위해 자잘한 괴인들을 잡으러 온 것 같다. 뭉게뭉게 검은 구름처럼 몰려 있었다. 멀리서 보면 사람들이라기 보단 꿀렁거리는 검은 덩어리로 보일 것 같다.


 “지난번엔, 저희 그룹이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우연이야...”

 “저희 그룹의 수장 후부키 님의 응급처치를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노스는 그들을 미심쩍은 표정으로 주시했다. 


 “이거, 받아주세요.”

 “...?”

 “사례입니다.”


 식용유 선물세트였다. 과일 음료수도 조금 딸려 있다. 저렇게 엄숙하게 검은 옷 차려입고 준다는 선물이 너무 소박하다. 아니, 아주 소박한 것만은 아니다. 흰 봉투가 딸려있기에 기쁘게 열어봤는데, 근처 섬으로 가는 여행티켓이 나왔다. 두둑한 현금인 줄 알았는데. 나는 눈에 띄게 실망했다. 이래서 사람이 기대를 하면 안 된다.


 “2인석 준비했으니 재미있게 놀다 오세요.”

 “아니 누구랑.”

 “당연히 제노스 님입니다.”


 나는 갑자기 짜증이 나서 빨리 가버리라고 손짓을 했다. 공식적인 커플인거 성질난다. 검은 정장의 그들은 모두 정중하게 목례를 하고 돌아갔다. 말단인 것 같은 남자는 다시 돌아왔다가 근처에 괴인이 출몰하니 조심하라는 말까지 전하고 후다닥 돌아갔다. 그런 거 이미 아는데.


 “가까운 섬이네요.”

 “어. 딱히 볼 것도 없는 곳인데.”

 “저렴한 티켓입니다.”

 “이건 팔아서 돈으로 만들자.”


 나는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여행가고 싶지 않다. 그런 여행 가느니 차라리 티켓을 돈으로 바꿔서 쌀을 사는 게 낫다.


 “생명을 구해준 사례로 주기엔 소박하군요.”

 “쟤들 후부키 엄청 좋아하는데.”


 나와 제노스는 잡담을 하며 길을 걸었다. 걷다보니 분위기가 무척 으스스해졌다. 괴인이 나올 분위기가 됐다.


 괴인 나오겠다 싶었는데 다음 골목에서 괴인이 정말 나왔다. 엄청 컸다. 온 몸에 가시가 돋쳐있는 괴물이다. 방어력 굉장히 높아 보인다. 무게는 5000kg 훌쩍 넘게 나갈 것 같다. 언젠가 자연 다큐멘터리에 푹 빠졌을 때, 코끼리의 무게가 그 정도 나간다고 들었다. 이번 괴인은 그 정도 크기다.


 “그냥 순찰하려고 한 건데 흉악한 녀석 만났네요.”

 “악의를 품고 있는지 확인해야하지 않냐.”

 “시내로 이어지는 길이 반절 사라진 걸 보면 악의 가득해 보입니다만.”

 “나쁘네.”

 “그렇죠.”


 나는 괴인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리고 잠바 바닥에 살짝 내려놓았다. 아래를 겨냥하고 괴인을 한 대 치자 괴인은 땅으로 푹 꺼졌다. 오늘도 역시 한방이었다.


 “...”

 “...”


 엄청 시시했다. 제노스는 녀석이 얼마나 깊이 꺼졌는지 아래를 대충 확인해본 뒤에 ‘지하 20m입니다.’ 라고 보고해주었다.






-





 제노스와 나는 공중전화 부스 옆에 마련된 낡은 벤치에 앉았다. 수화기는 분리되어서 바닥에 대롱대롱 떠 있다. 수화기에선 뚜 뚜 정체불명의 소리가 흘러나오는데, 아무도 수화기를 제 자리에 놓아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곳은 사람이 다니지 않기 때문이다. 얼핏 보면 그냥 동네 풍경과 비슷해서 간혹 멀리서 개 짖는 소리라도 날 법 한데, 여긴 고스트타운이라 아무 소리도 안 났다. 그저 한없이 조용했다. 


 “패널티 생각보다 쉽네.”

 “네. 이런 식으로 쭉 함께 시간을 보내면 됩니다.”

 “쉽네.”


 제노스는 왜인지 고개를 저었다. 왜 고개를 젓는 거지. 내가 쉽다는데. 나는 흙먼지가 섞인 바람이 불어오기에 후드를 뒤집어썼다. 그리고 지퍼를 턱까지 올렸다. 그런 나를 내려다보면서 제노스는 패널티에 대해 설명했다.


 “패널티가 괜히 패널티겠습니까.”

 “엥, 뭐가.”

 “데이트 때는 모든 일정을 전과 똑같이 지내주셔야 합니다.”

 “응.”

 “우리는 그냥 이런저런 잡담을 하다가.”

 “응.”

 “문득 생각나면 그냥 이렇게 키스했습니다.”

 “..헉.”


 제노스는 내가 놀라는 것에 아랑곳 않고 후드를 살짝 걷은 뒤 관자놀이 부근에 입 맞췄다. 나는 패널티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인지 실감했다. 예기치 못했기 때문에 저항할 수 없었다. 너무 자연스럽고 빠른 동작이었다. 제노스가 닿은 부분이 부드러웠기 때문에 나는 다시 한 번 충격을 받았다. 입술 소재 무엇으로 만들어진 것인지.


 “야! 뭐 하는 거야.”

 “패널티 이행했습니다.”

 “악.”


 나는 제노스가 지나간 관자놀이 부근을 손바닥으로 박박 문질렀다. 내 옷의 팔 안감에 소름이 마찰하며 닿는 걸 보니 소름 제대로 돋았다. 


 “...헉.”


 박박 관자놀이 문지르며 불쾌해하는 틈을 타서 이번에는 입술에 뭔가 닿았다 떨어졌다. 이 자식. 나는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제노스는 자긴 아무것도 안 했다는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있었다. 능구렁이 같다. 게다가 능구렁이 주제에 엄청 빠르다.


 “싫어하셔도 별로 기분 나쁘지 않습니다.”

 “으....”

 “왜냐하면 이전에도 뽀뽀 못해 죽은 귀신이 붙었냐고 타박 주셨습니다.”

 “아, 그래. 좀. 제발 하지 마.”


 나는 과거의 내가 이해가려고 하는 이상한 기분이 되었다.


 “집에 가면 또 언제나처럼, 섹스해주시겠지요.”

 “뭐?”

 “패널티 일정에 포함입니다.”


 나는 오늘 외출 전부터 제노스가 내게 패널티라며 개처럼 엎드리라고 요구하지 않은 점에 대해 감사하고 있었는데, 그 감사함 취소해야 할 것 같다. 데이트 일정엔 모든 게 포함되어 있었다. 역시 제노스는 어린 나이에 비해 약바르고 영리하다. 절대 손해 보는 장사 하지 않는다.


 “그건, 좀. 지금의 나에게 허들이 높다고 생각 안 해?”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신가요.”

 “마음의 준비 필요한 정도가 아니라 못 해.”

 “그 정도 대답은 예상했습니다.”

 “예상했으면 좀... 이해해줄래?”


 나는 제노스 자살한다고 집 나가는 거 원치 않는다. 실은 일주일간 설거지 내가 해야 했다. 제노스가 집 나가면 요리 담당과 설거지 담당과 청소 담당이 동시에 없어진다. 있을 땐 몰랐는데, 없어지니까 그 존재감이 느껴졌다. 제노스 다음에 또 집 나가면 정말로 전단지 붙일 것이다. 


 “그럼 오늘 패널티는 이행 못 하신 걸로 체크해두겠습니다.”

 “...”

 “언젠가 꼭 갚아주세요.”

 “...?”

 “한 달 안에 마음의 준비 해주시리라 믿습니다.”

 “기간 설정하지 마, 임마!”


 나는 택도 없는 소리를 해 대는 제노스 때문에 어이가 없었다. 그냥 장난치는 건지, 진심으로 말 하는 건지도 헷갈린다. 제노스는 기본적으로 진지하게 생긴 얼굴이라 말 할때마다 저게 농담인지 진심인지 무지 헷갈린다. 아마 진심으로 농담을 하려고 들어도 하나도 안 웃길 것이다. 약속 노트 9번 조항 말할 때만 웃겼다. 그건 진짜 웃겼다. 


 “게다가 선생님은 패널티 3개시니까요.”

 “뭐?! 그 얘기 처음 듣는데?”

 “3가지 조항 어기셨잖습니까.”

 “...?”

 “오늘은 3개중 1개 이행하다가 실패하신 걸로 알아듣겠습니다.”


 나는 왠지 멍해졌다. 오늘이 끝이 아니라니. 1/3 달성하려다가 그나마도 실패했단다. 갑자기 내 머릿속엔 엄청나게 까마득한 이미지가 그려졌다. 


 왠지 드넓은 사막에 나 홀로 버려진 심상이 떠올랐다. 그 사막에는 아주 멀리 작은 붉은 깃발이 보인다. 붉은 깃발로 가기까지 3km 남았다. 나는 모래바람이 너무 거세서 거의 기어가듯이 그 깃발을 향해 필사적으로 갔다. 그런데 사이보그 같은 녀석이 불쑥 오더니 [1/3 오셨습니다.] 라고 말했다. 나는 고작 그것밖에 기어오지 못한 나 자신에게 놀랐다. 본인의 한심함에 놀라고 있는 중에 사이보그는 곧 [아, 기분 탓이었네요.] [실은 조금도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셨습니다.] 라고 첨언했다. 나는 무척 절망했다.


 “...생각 좀 해 보고.”

 “네.”


 일단 대답은 미루기로 했다. 대답을 미뤘다 뿐이지 집에 가서 제노스를 내쫓고 내가 설거지하게 될 확률이 높다.





-







 시내 쪽으로 접어드는 길을 천천히 걷고 있었는데 후방에서 빠른 속도로 살기가 느껴져서 본능적으로 피했다. 나를 꿰뚫지 못한 가시가 거대한 벽을 대신 허물었다. 그리고 살기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뭐지.


 싸움은 한 방에 끝난 게 아니었다. 이런 적은 오랜만이다. 그 거대한 가시 돋친 괴인은 한 마리가 아니었다. 수백 마리의 가시괴인이 모여 구성된 집합체였다. 지하 20m에서 위로 올라온 가시 하나하나가 지상으로 올라오며 공격해왔다. 물론 모두 쾅쾅 터뜨리면 됐지만, 워낙 숫자가 많다보니 귀찮았다.


 “한 마리 한 마리가 모두 최소 호급 이상입니다.”

 “강한 거냐.”

 “강합니다.”


 잡는 건 어렵지 않았다. 나야 언제나 한 번 치면 끝이다. 하지만 숫자가 워낙 많아서 연타해야했다. 엄청난 속도로 연타를 했는데도 ‘이제 1/15 끝났습니다.’ 라는 제노스의 말을 듣자 열받았다. 아까의 모래사막 심상이 겹쳐지기도 하고 좀 화났다.


 “이제 어느 정도 끝났어?”

 “1/10은 없어졌습니다.”

 “끝인 줄 알았는데.”


 제노스는 전력을 측정하는 동시에 싸우기까지 하느라 대화할 겨를이 없어보였다. 이 정도의 엄청난 괴인을 순찰 도중에 덜컥 만나버리다니. 이 도시 근처에 눌러 사는 주민들 정말 대단하다. 모두가 괴인의 습격을 즐기는 변태 마조히스트일지도 모른다. 그들이 변태가 아니라면 나와 제노스가 그동안 데이트하며 지켜낸 사람들일 것이다. 


 “긴장감 없는 싸움이지만 귀찮은 타입이네.”

 “그렇죠. 체력이 필요한 싸움입니다.”

 “한꺼번에 없애는 방법 없을까.”

 “개별적으로 행동하는 괴인들이라 일일이 잡아야 합니다.”

 “얼마만큼 잡았지?” 

 “1/5 잡았습니다.”

 

 나는 제노스에게 잠시 공중에 떠 있으라고 시켰다. 제노스는 내 말대로 소각포의 출력을 이용해서 공중에 떠 있었다.


 쿵.


 나는 바닥을 주먹으로 쳤다. 일대가 들썩이며 귀찮은 괴인들이 한꺼번에 땅으로 꺼졌다. 문제는 이 일대의 고스트타운 건물 여러 개 무너졌다. 어차피 폐건물이니 괜찮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몸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이 근방 약 200m의 건물들이 부서지고 땅이 꺼지는 것을 배경으로 제노스와 나는 날아올랐다. 내가 날 수 있는 이유는 제노스가 나를 둘러메고 날고 있기 때문이다. 너무나 익숙하게 둘러메기에 말릴 틈도 없었다.


 “...”

 “깨끗이 소탕했군요.”

 “...”

 “역시 선생님이십니다.”

 “이제 슬슬 놔 줄래.”


 제노스는 소각포의 출력을 이용해서 더 높이 날았다.


 “폐건물의 잔해에 피폭당하지 않으려면 잠시 공중에 있어야 합니다.”

 “이 자세 좀 갈비뼈 결리거든.”

 “아, 그럼 아직 무너지지 않은 건물로 이동하겠습니다.”


 제노스는 나를 둘러멘 채로 고층 건물로 올라갔다. 워낙 짧은 시간에 훌쩍 올라가서 여기가 얼마나 높은지 감이 안 왔다. 고개를 돌려 힐끔 밑을 보자 엄청 까마득했다. 제노스는 천천히 속도를 줄이더니 어느 폐건물의 옥상에 도달했다. 나를 내려놓기 전에 또 손바닥의 출력을 이용해 내가 앉을 자리를 깨끗이 했다. 그 배려가 왠지 습관적인 동작으로 보여서 과거의 우리가 어떤 식으로 연애했는지 짐작이 갔고, 좀 소름끼쳤다. 


 “안으면 싫어하시리라 생각해서. 둘러멨습니다.”


 나는 갑자기 제노스가 나를 둘러멘 것에 대한 불만이 싹 사라졌다. 둘러메는 게 갈비뼈는 좀 아프지만, 안기보다는 그림이 나은 것 같았다. 그런데 뽀뽀는 제멋대로 마구 해놓고 이런 부분에서 세심하게 내 비위 맞추는 제노스 이상하다.





-





 근처 200m의 땅이 움푹 꺼져있고, 우리가 나란히 앉아 있는 고층 건물만 우뚝 서 있는 황망한 공간에는 흙먼지가 휘날렸다. 오늘도 위험한 괴인 소탕했지만, 동시에 고스트타운에 가벼운 재난사건 일으켜버렸다. 어차피 폐건물이니까 상관없지만.


 “운동했더니, 라면이 다 소화됐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고층 폐건물의 난간에 걸터앉아 다리를 덜렁덜렁 흔든다던지, 푹 꺼진 땅을 굽어보며 발로 자갈을 밀어 떨어뜨리며 놀았다. 바닥이 많이 꺼졌는지, 자갈을 떨어뜨린 뒤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쿵 하고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나서 재미있다. 그런 식으로 고스트타운 폐허 속을 하염없이 돌아다니며 놀았다.


 나와 제노스가 걷는 걸음마다 부연 흙먼지가 일었다. 나란히 걸으려니까 흙색 연기가 나는 드라이아이스 사이를 걷는 착각도 들었다.


 “저녁거리 장 볼까요.”

 “라면은 점심으로 먹었으니까 다른 거 먹자.”

 “그러죠.”


 어느 새 저 멀리 보이는 해는 언덕을 넘어가고 있었다. 뉘엿뉘엿 노을이 지고 있다. 


 “근데 이게 뭐지.”


 폐건물 어딘가에 낙서가 쓰여 있다. 금이 간 기둥 옆에 정갈하게 正자가 그려져 있다. 세어 보니 6회 정도가 기록되어 있다. 뭘 센 걸까.


 “저 낙서의 의미를 아십니까?”

 “뭔데.”

 “제가 적어 둔 것입니다.”

 “하긴 고스트타운에 오는 사람들 우리 정도로 강하지 않으면 없으니까.”

 “네. 저라던지 선생님 정도가 아니면 잘 오지 않습니다.”


 바를 정자는 붉은 분필로 적은 것 같다. 짧게 부수어진 붉은 분필이 근처에 나뒹굴고 있다.


 “우리의 옥외섹스 횟수입니다.”

 “...”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제노스는 내 반응을 보더니 씩 웃었다. 제노스 저 자식 처음엔 내 기억상실 완전히 절망스러워 하다가, 어느 시점부턴 이성의 끈을 놓았나보다. 미친 놈. 내가 황당해하는 모습 보고 즐기고 있는 것 같은데. 좀 불쾌하다. 제노스는 자살하려고 맘먹고 죽음의 문턱 다녀와선지, 가출 이후 더 여유가 생겼다. 저승사자와 한번 악수하면 저런 관록 생기는가. 녀석의 야하고 여유로운 텐션 익숙해지면 안 되는데 좀 익숙해지고 있다. 큰일이다. 내 인생의 시나리오 쓰고 있는 녀석 누구냐. 착하던 제노스 왜 저렇게 만들었냐. 불러와서 내 앞에 앉혀놓고 한 대 치고 싶다.


 뉘엿뉘엿 노을이 지고 있다. 전봇대가 꺾여서 여기저기 이쑤시개처럼 박혀 있는 음침한 풍경이다. 해의 방향이 멀어져서 건물 잔해의 그림자가 길게 진다. 제노스는 노을을 등지고 서서, 역광 때문에 얼굴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한동안 우리는 말이 없었다. 정적을 깬 것은 역시 제노스였다.


 제노스는 아까의 짓궂음은 사라지고, 어딘가 묘하게 조용한 기색이 됐다.


 “우리의 섹스는 좋았습니다.”

 “좋지 않으면 했겠냐.”


 제노스는 내 대답은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독백처럼 말하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사람의 몸을 가졌습니다. 피부 밑으로는 뜨거운 피가 돌고, 혈관이 지나갑니다. 속눈썹 하나 하나와  손톱 발톱까지 모두 소중한 당신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수백번은 갈아끼워 온 기계의 몸입니다.”

 “...”

 “저의 몸을 만들기 위해 어떠한 철광석이 쓰였는지는 저 조차도 모릅니다.”

 “...”

 “그저 쇳물 녹이는 과정에서 나쁜 벌레라던지 흙먼지 들어가지 않았기를 기도했습니다.”

 “...”

 “당신의 몸과 섞일 몸이니까요.”

 “...”

 “...”

 “...”

 “소중한 당신의 몸과 더러운 내 기계체가 섞이게 허락해줘서 언제나 감사합니다. 선생님의 내벽 너무나 좋았습니다. 그저 좋았다는 말로는 표현이 안 될 정도로 좋았습니다.”


 나는 제노스의 애정표현의 크기에 말문이 막혔다. 제노스는 별로 내 대답을 바라지 않는 것 같다. 무슨 말을 하더라도 시원찮은 대답해서 자기 기대 배신할게 뻔하니까 그냥 본인 하고 싶은 말을 하려는 것 같았다.


 “...”

 “내 흉물을 감싸주는 상냥한 이 곳에선 내 아이도 자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이론적으로 완전히 불가능하다는 걸 알면서도 아기 생긴다란 예감 오는 것, 너무나 이상합니다. 하지만, 더 이상한 것은, 이렇게나 서로 사랑하는데 아기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

 “...”

 “...”

 “그래서 아기 신발 모았습니다.”

 “또라이 아냐...?”

 “...”

 “...”

 “...”

 “얼마 전까지만 해도 행복의 크기가 어마어마해서 무서웠습니다. 말도 안 되게 큰 선물 받아버렸으니 언젠가 벌 받을 것 같아서요. 신이 있다면 제게 여한이 있느냐고 물어본 뒤 목숨 거두어 갈 것 같았습니다.”


 제노스는 행복을 무서워하는 것 같다. 결국 벌 받았잖은가. 자기 연인이 카레 따위 엎고 놀라서 기억 잊는 벌을 받았다. 기억 잃는 계기 너무 시시해서 웃음 나올 정도다. 차라리 공중파로 방영됐던 제노스 특집에서처럼, 괴인과의 전투 중에 머리 박고 기억 잃었으면 오죽 좋았을까. 히어로로서의 명분도 서고 말이다. 카레 엎고 식겁해서 연인이고 친구고 뭐고 다 까먹다니. 이게 남의 사연이라도 참 안타까웠을 텐데 내 이야기다.


 날이 어두워지는 와중에 간간히 밝다 싶었는데, 내가 부순 전신주의 전선들이 합선되어서 푸른 스파크가 튀는 거였다. 그건 제노스 신체의 일부분이 부수어졌을 때 튀는 것과 비슷한 색이었다. 나는 지금 노을이 지고 있는 더러운 폐허 사이에 서 있는 중인 것뿐이지만, 별 같이 빛나는 스파크 덕에 왠지 우주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 들었다. 우주같이 멋진 곳에서 제노스의 뻘소리 듣고 있다니. 인생은 그런 것이다.


 “제게 행복은 두렵습니다. 복수귀처럼 살아온 삶이 행복해져봤자 얼마나 행복할 수 있을까 언제나 막연하게 포기해왔습니다만, 그 때는 슬슬 낙관하고 싶은 시점이었습니다.”


 노을은 계속해서 붉었다. 반대로 스파크는 희고, 가끔 파랬다. 해를 등진 제노스는 역광으로 내내 검었다. 나는 그 기묘한 풍경 가운데에 그냥 가만히 앉아 있었다. 폐건물의 난간에 가볍게 기대 앉아있는 중이다. 그리고 나는 난간에 기댄 채로 제노스를 내 집에 들인 것은 ...길에서 강아지를 주워 온 것과 비슷한 개념이 아니라는 것을 슬슬 깨닫고 있었다. 


 제노스는 단지 [키워주세요] 라고 적힌 박스에 앉아있는 비 맞은 강아지가 아니었다. 혼자 생각할 줄도 알고 우울해할 줄도 아는 인격체였다. 때론 웃을 줄도 안다. 심지어 버림받으면 자살하고 싶어 한다. 쇳덩이는 쇳덩이지만 아무튼 그런 잘난 로봇이었다. 나 어디부터 잘못했던 걸까. 애초에 내 원룸에 녀석을 들였을 때부터가 잘못됐을지도 모른다. 


 “...당신이 조금 같이 자 준 정도로 방심을 하다니 저는 학습능력이 없습니다.”

 “조금 자 준 정도라니. 엄청 자 줬잖아. 분필로 바를 정자까지 써 가면서.”

 “그렇습니까. 언제나 부족했는데.”

 “그게 부족하면 괴물이냐.”


 아무리 생각해도 제노스는 좀 괴물이었던 것 같다. 제노스의 기억 속의 나는 의복 갖춰 입은 묘사 별로 없다. 무슨 상업 동인지도 아니고, 징글징글하다.


 “...”

 “...”

 “입 맞추면 단 맛이 나는 선생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을 좋아하지만.” 

 “...”

 “그 중에서도 제가 가장 좋아하는 선생님의 말은.”

 “...”

 “더러운 나와 몸을 섞어준 것에 대해 감사를 전할 때 반박해오는 말들입니다.”

 “...내가 그랬어..?”

 “내 연인을 더럽다고 욕하지마. 죽고 싶냐! 라면서 화 내셨습니다.”

 “아.... 하하......”


 나도 좀 미쳤었던 거 같다. 제 정신 아니었구나. 그러니까 죽이 맞아서 같이 살았지. 왠지 내가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었다면 담배라도 한 개비 꺼냈을 것 같은 기막힌 기분이 되었다. 하지만 난 담배 안 피운다. 호기심으로도 입에 대 본 적 없다. 담배는 비싸다. 그리고 학창시절엔 담배 피는 양아치 그룹에게 내 돈 빼앗긴 적도 있다.


 “진심으로 발끈해서 화를 내는 당신을 보고 있노라면.”

 “...”

 “행복해서 눈앞이 아득해졌습니다.”

 “...”

 “지금까지 겪어 온 이 세상의 많은 우울을 다 잊게 되었습니다.”

 “...”


 네 우울한 사연이 깊은 것은 알고 있었다. 망토를 입고 있었다면 망토가 잔잔히 휘날렸을 정도의 저녁 바람을 맞으며 나는 허공을 보고 앉아있었다.


 “...”

 “...”

 “그리고 일부러 자학하고 싶은 욕심도 생겼습니다.”

 “...”

 “당신이 나를 감싸 주시는 게 좋아서요.”

 “...내가 너의 이야기에 대체 무슨 대답을 해줘야 하지.”

 “아무 말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나는 거짓말이 아니라, 정말 아무런 대답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냥 내가 한 잘못의 크기에 머리가 텅 비어버렸다. 하지만 잘못이라기엔 억울하다. 어느 순간부터 그냥 불가항력으로 연인이고 뭐고 다 모르게 되었는걸. 


 “...이런 엄청난 이야기 듣고만 있으라고.”

 “...네.”

 “미안해.”

 “압니다.”

 “다 미안하다.”

 “...”

 “하지만 하나도 기억 안 나.”


 기억이 돌아오면 과연 행복할지도 잘 모르겠다. 기억 돌아오면 무척 괴로울 것 같은데. 지금도 충분히 미안해하고 있는 제노스에게 더욱 미안해질 것 같다.


 “...”

 “웃기지, 정말이야.”

 “...”

 “근데 나 답지 않냐..”

 “그렇네요.”


 제노스는 다행히도 납득해주었다. 우리는 또 한동안 말을 나누지 않았다. 나는 자갈을 툭 발로 찼다. 내가 있는 건물이 높아서, 수 십 초 뒤에야 쿵 하고 바닥에 자갈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이 짓도 더 이상 재미있지 않았다.






-








 이불을 깔았다. 나도 지금 내가 하려는 짓이 안 믿긴다. 나는 지금부터 제노스와 잘 것이다. 잠을 쿨쿨 잔다는 뜻이 아니라 성인으로서 섹스를 한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홀에다가 스틱을 넣는다 이 말이다. 제기랄. 제노스와의 말싸움 이기기도 영 힘들고, 사연 들어보니 불쌍하기도 하고, 참 더럽고 치사해서 한 번 자 주기로 결심했다. 실은 집 오기 전에 마트에서 장을 볼 때 까지만 해도 제노스 내쫓을까, 싶기도 했는데, 집에 걸어오는 길에 충동적으로 마음 바꿨다. 내 결심 말해주자마자 제노스 엄청 놀랐다. 


 원래는 항상 제노스와 따로 자니까 이불이 두 채지만, 오늘은 한 채를 깔았다. 


 나도 지금 내가 하려는 짓이 믿기지 않는다. 남자, 그것도 사이보그와 섹스한다. 그냥 사이보그도 아니고 나를 스승이라고 모시는 녀석이다. 모기의 외형을 한 요괴를 해치운 뒤 안면을 트고, 겨우 재회해서 거의 초면이나 다름없는데 곧장 스승이라 모시기 시작한 어이없는 녀석이다. 나는 이제부터 그 놈과 자게 생겼다. 신이 있다면 그는 나를 보살피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사이보그는 인간이랑 고간 구조 똑같은 걸까. 어디에 무엇을 어떻게 넣을지가 감도 안 잡히고, 영 공포스럽다. 하지만 나는 한 달 내 내 불안에 떨며 골머리 앓느니 하루 눈 딱 감고 자 주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나는 깔짝깔짝 작은 골칫거리가 내 머릿속을 돌아다니는 것을 싫어한다. 그런 거 열 받는다. 나는 스트레스를 견디느니, 리스크가 크더라도 문제를 해소해버리는 편을 택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섹스가 아프면 중간에 그만둘 거라고 제노스와 약속했다. 아프면 언제든지 그만둘 것이다. 손톱 잘못 깎았을 때만큼만 아파도 곧바로 그만둘 것이다. 죽어라고 소리 지를 것이다. 어른답지 못하다는 자각이 느껴져서 스스로 수치스러울 정도로 소리 지를 것이다.


 “콘돔은 전에 쓰던 걸 쓰겠습니다.”

 “으..응?”

 “충분히 남아 있습니다.”


 제노스는 텔레비전 옆의 서랍을 열었다. 서랍 안에는 콘돔 박스가 들어있었다. 나는 지금껏 살면서 콘돔 써본 적 없다. 여자에게 써본 적도 없고 남자에게 써본 적도 없다. 궁금해서 자판기에서 사 본적은 있지만 개봉해본 뒤 실망했다. 예상대로 미끌미끌한 비닐쪼가리였다. 


 동정인 남자 비웃는 사회 분위기 마음에 안 든다. 위로해주지는 못할망정 굳이 놀리고들 앉아있는 풍조, 기형적이다. 하기 싫거나 할 상대가 없으면 그냥 안 하면 된다. 섹스 안하면 거시기 붙잡고 앞으로 고꾸라져 죽는 병에 걸린 사람이 아닌 이상, 그냥 안 하면 된다. 평소의 내 생각이 그렇게 무성애자에 가까워선지 콘돔은 더 충격적이었다. 이전의 우리가 활발한 성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건 제노스에게 들어서 어렴풋이 알고 있었는데도 또 놀랐다. 기억에 없는 과거의 내 이야기가 너무나 딴 세상 이야기 같아서 그동안 딱히 와 닿지 않았는데, 오늘 실제로 콘돔 박스를 우리 집 서랍에서 발견하니까 실감이 나서 충격적이었다. 원래 저 곳은 반창고 따위만 넣어두던 서랍이었는데, 어느 새 야시꾸리한 콘돔이 존재하게 됐다. 


 엄청나게 황당하다. 나는 그냥 카레를 엎었을 뿐인데 서랍에 콘돔이 왕창 생겼다. 주간 개그만화도 이 정도까지 사람을 몰아붙이진 않는다. 최근 자주 드는 생각인데, 신이 있다면 그는 나를 보살피지 않을뿐더러, 나를 싫어하기까지 하는 게 분명하다. 신 따위 정말이지 싫어진다. 신과 나의 감정의 골이 점점 깊어진다. 저승에 가서 얼굴 마주보게 되면 기필코 한마디 한다.


 정말 과거의 나는 제노스와 자고 있었던 것 같다. 그것도 상호 합의 하에. 나는 엄청 강하니까 제노스가 억지로 했을 리 없다. 순전히 서로 좋아서 잔 것이다. 소름이 와사사 끼친다. 콘돔 박스는 심지어 50개들이었는데, 3분의 2가 이미 없었다. 제기라아아아알.... 과거의 나, 엄청 해댔잖아.... 제기랄, 제기랄..... 이렇게나 자주 아랫도리 내주다니, 나 제노스 엄청 사랑했잖아.... 제기랄....


  우리는 고스트타운에서 뒹굴다 왔으므로, 귀가한 뒤에 목욕했다. 욕실이 워낙 좁아서 따로 씻었다. 제노스가 수건을 어깨에 걸치더니 천천히 장바구니를 뒤지며 장 봐온 것들을 냉장고에 집어넣기 시작했다. 나는 이불 위에 앉아서 내심 계속 긴장하고 있었다. 예상 밖으로 제노스는 덤덤했다. 나보다 경험 많다 이거냐. 제노스가 다가올 때까지 나는 계속 쫄아 있었다. 




 “선생님.”

 “어.”

 “여전히 좋아합니다.”

 “알아.”


 제노스는 이불 위에 꿇어앉아 살풋 웃었다. 우리는 어색하게 마주보고 앉아 있는 참이다. 이전에는 몰랐는데, 제노스가 웃을 때는 눈이 접히면서 소년다운 인상이 된다. 나는 제노스를 좋아하지 않는데도 제노스는 여전히 나를 좋아한다고 말해온다. 제노스의 순정을 저버리는 점에서 이미 죄책감이 생기는데, 소년같은 얼굴으로 그렇게 말해오기 때문에 그 죄책감이 두 배가 된다. 내가 좋다는 제노스가 안쓰럽기도 하고 부담스럽기도 하고 여러 가지 감정이 뒤죽박죽이다. 


 “실은 좋아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에엑.”

 “..사랑하고 있습니다.”

 “부담스러워.”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던지 못된 짓을 해도 좋아합니다.”


 어쩐지 심장이 내려앉아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징그러운 대사인데. 왜 나는 울 것 같아지는지 모르겠다. 머리와 몸이 분리된 기분이 들었다. 


 저 드라마에도 나오지 않을 대사 황당해 죽겠는데, 몸은 먼저 제노스에게 미안하다고 고한다. 물리적으로 심장이 조인다. 눈물샘이 왈칵왈칵 뜨거워진다. 내 머릿속은 아무런 감상도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몸이 멋대로 슬프다고, 미안하다고 울어댄다. 이런 신체반응 너무 당혹스럽다. 나는 왠지 제노스에게 미안해 죽겠는 표정을 짓고 있었던 것 같다. 불가항력으로 심장이 쿵쾅거렸다. 머릿속은 그저 제노스놈 부담스러워.. 정도의 생각 하고 있는데도.


 “키스해도 됩니까?”

 “아니.”

 “키스하는 편이 수월합니다.”

 “야동 찍냐.”

 “정말입니다.”


 제노스는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아. 입술이 가까워진다. 세상에. 키스했다. 지금 이 키스는 술자리 게임 벌칙이 아니다. 


 이건, 사귀고 있는 연인의 키스다. 진짜로 혀 마구 들어온다. 제노스 나 엄청 좋아하는 것 같다. 그것도 진짜 많이 좋아하는 것 같다. 그리고 자신의 모든 욕구를 상대가 받아줄 것임을 확신하는 기세의 키스다. 아... 망했다. 


 나는 어쩐지 다리에 힘이 풀렸다. 뭐냐. 이거. 나는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누군가 보고 있지도 않은 게 분명한데도 나는 주변을 확인하고 싶어졌다. 너무나 부끄러운 기분이 됐다. 안절부절 못하겠다. 머릿속은 당혹스러운 정도의 감상인데, 몸은 힘이 풀리고 난리였다. 


 “아무리 패널티라도. ...의외입니다.”

 “나도 내가 의외야.”


 정말 나도 내 자신이 의외다. 스스로의 선택이 얼마나 의외냐면 지금 약간 내 어깨가 덜덜 떨리고 있다. 손도 좀 떨린다. 달리 행위가 무섭다거나 그렇진 않다. 생리적인 반응으로 어쩔 수 없이 떨리는 것일 수도 있다.


 “마음은 허락 안하신 것이겠죠.”

 “당연한 걸 묻냐.”

 “그 정도야 예상했습니다.”


 제노스는 나를 천천히 밀었다. 그래서 내 몸은 뒤로 넘어갔다. 제노스의 양 팔 사이에 갇히자 이젠 정말, 늦었구나, 되돌릴 수 없는 순간이구나, 하고 아득한 기분이 들었다. 


 “...”

 “선생님. 지난 반 년이 기억에 없는데도.”

 “...”

 “제 고집 들어주시는 점.”

 “...”

 “상냥합니다.”

 “...”


 나는 상냥하지 않아. 라고 속으로만 생각했다. 왜냐하면 대답하려고 할 때마다 제노스가 짧게 키스해서 입이 막혀버렸으므로. 제노스는 본인 할 말만 하고, 내가 반박하려고 하면 키스로 입을 막아온다. 치사하구나. 


 “아닌 척 해도, 역시 선생님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

 “그래서 더 좋아하게 됐습니다.”


 사이보그는 입 안이 어떤 구조인지 오늘부로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숟가락을 빨 때처럼 쇠 맛이라도 날 줄 알았는데 그냥 인간이랑 똑같다. 금방이라도 녹을 듯이 따뜻했다. 아니 따뜻하다는 표현은 영 부족하다. 거의 뜨거웠다. 그건 엔진의 탓이라고 넘겨짚는다. 그리고 축축했다. 그냥 내 입 안이랑 똑같았다. 슬슬 지금 우리가 키스중인지를 자각하지도 못할 정도로 키스했다. 제노스의 혀가 내 입 안으로 들어와서 이리저리 섞였다. 제노스는 키스에 대단히 능숙했다. 마치 나에게 키스하기 위해 태어난 것처럼. 그 애의 혀는 내 입 안에 원래 살고 있었던 것처럼 굴었다. 나는 여러 가지 재지 않고 그냥 기분이 좋아졌다. 이런 내 자신이 우습지만, 나는 약간 무너져가고 있었다. 몸에 든 습관이란 건 무섭다. 머리가 뭐라고 명령을 내리던 그것을 초월해서 먼저 좋다고 무너져버린다. 


 겨우 겨우 입을 떼자 서로의 입 주변이 번들거리는 게 보였다. 제노스는 호흡이 약간 한숨같이 변했다. 나는 그것보다 심했다. 거의 헐떡이는 중이었다. 아, 쪽팔리다. 나는 제노스와의 키스 정도로 무슨 상업지의 배우처럼 헐떡거렸을까봐 걱정됐다. 애써 힘이 빠진 몸을 제대로 가누려고 노력했다. 귀가 너무 뜨거워져선지 베개에 귀가 닿을 때마다 베개가 차갑게 느껴진다. 나는 애써 다시 숨을 고르게 했다. 그런데 잘 안 됐다. 나는 전혀 제노스를 사랑하지 않는데 제노스에게 익숙한 몸은 제노스를 갖고 싶다고 안달이었다. 몸과 머리의 의견이 달라 본 적은 처음이라 당혹스럽다.


 “기억을 잃으신 이후 제대로 된 첫 키스네요.”

 “기분 나빠.”

 “기분 나쁘셨습니까?”

 “그래. 서로 침 빨아먹고, 더럽네.”


 제노스는 픽 웃었다. 제노스는 요즘 괴로울수록 웃어버리는 습관이 들었다. 언제부턴가 제정신은 아닌 거지, 이 놈도... 사귀는 동안 나와 자주 키스했다던 제노스의 심정을 생각하면 미안하지만, 진심으로 불쾌했다. 거의 초면이나 다름없는 남자, 그것도 사이보그와 헉헉거리며 입 맞추다 나도 모르게 몸에 힘이나 빠지다니. 수치스럽다.


 “더러운데도 참고 키스해주셔서 기쁩니다.”

 “...”

 “선생님은 정말.... 상냥한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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