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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노사이] 카레를 엎은 날 4 
작성일시 : 2016. 1. 16. 01:35 | 분류 : 장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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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에 오자마자 노트북을 켰다. 노트북은 제노스의 것이지만 비밀번호 걸려있지 않았다. 떠듬떠듬 인터넷 아이콘을 클릭했다. 그리고 가장 먼저 나오는 검색엔진에다 귀신 사이보그를 입력했다. 검색 결과가 엄청나게 많이 나온다. 동영상도 많이 나왔다. 역시 지금 이슈의 중심이구나. 제노스는 스튜디오 같은데서 촬영하지 않았고, 충동적으로 방송국 사람들 불러서 촬영한 것 같았다. 팬서비스라기 보단 분명 뚜렷한 개인적인 목적이 있는 것이다. 플레이를 누르자 광고영상이 먼저 나왔다. 광고를 보는 짧은 시간동안 내 안의 용기를 최대한 끌어냈다. 그리고 부디 별 영상이 아니길 기도했다. 제노스가 방송에 대고 나에 대한 이야기 어디까지 주절거린 건지 아직 모르기 때문이다.


 “귀신 사이보그의 역사적인 첫 방송 출연입니다.”

 “채널 고정하지 않으면 손해겠지요.”


 급조된 특집 프로그램 mc들이 떠드는 소리가 시끄러워서 제노스가 나올 때까지 빨리감기를 했다. 제노스가 보일 때까지 빨리감기 하는데 한참 걸렸다. 요즘의 시청자들 인내심 대단하구나 싶다. 드디어 제노스가 얼핏 보여서 일시정지 누르고, 재생했다. 화면 속의 제노스는 짜증나있는 느낌이다. 촬영지는 방송국도 아닌 것 같은 정갈한 어느 건물이다. 회전문을 신경질적으로 밀치는 모습이 뭔가 대단히 열 받은 기색이었다.


 “질문은 세 개까지 받는다.”

 “...”

 “...”


 제노스는 대뜸 그렇게 말했다. 남자 아나운서 한 명과 여자 아이돌 한 명, 염색 화려하게 한 신인 히어로 조합으로 출연하고 있었는데 그 멤버들이 모두 조용해졌다. 질문을 3개로 추리라는 미션을 갑자기 받은 남자 아나운서는 당황해서 큐카드를 마구 넘겨댔다. 그리고 PD와 짧게 상의하더니 다시 돌아왔다. 이 부분의 영상은 돌발상황 같았다.


 “애인이 있습니까?”

 “있다.”


 제노스는 나이 꽤 있어보이는 남자 아나운서에게 마구 반말했다. 알고는 있었지만 제노스는 원래 저런 녀석이다. 


 “어떤 사람입니까?”

 “시간이 없다. 곧 가야 한다.”


 제노스는 여전히 뭔가에 열받아 있는지 잔뜩 미간을 좁혔다. 문답무용이라고 판단했는지 개인적인 발언을 할 기회를 달라고 요청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화면은 온통 검게 변했다.


 갑자기 [해당 히어로의 진술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영상입니다] 라는 자막이 나왔다. 제노스는 본인 지시 끝마치고 돌아가 버린 것 같다. 


 ‘정 없네, 제노스... 바쁜 연예인들 자리해줬는데.’ 


 곧 영상에는 아주 예쁜 여자가 나왔다. 신인 아이돌 중에서도 배우 지망하는 여자애 정도이려나. 히어로 프로그램 재연배우는 그런 사람 많이 쓰니까.


 나는 애써 침착하려고 캔커피를 따서 벌컥벌컥 들이켰다. 미지근해서 영 맛도 없었다. 내레이션을 들어보니 그 여자는 강하고 아름다운 제노스의 연인 역할이란다. 나는 내레이션을 듣자마자 캔커피를 공중으로 분무했다. 내가 마시던 것이 맑은 물이었다면 작은 무지개 생겼을 것이다.


 그 여자는 히어로 망토를 두르고, 여러 가지 활약을 하는 강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제노스가 방송국 측에 넘긴 서술이 ‘강하다’ ‘아름답다’ 한 두개 정도로 지나치게 간결해서 작가들이 재구성 할 때 내 모습이 아이돌 느낌의 여성 히어로로 묘사된 것 같다. 솔직히 약간 어지러운 지경이 되었지만, 영상 끝까지 봐야 하므로 현기증 참아냈다.




 제노스 역할은 딱히 대체할 배우가 없는지 나오지 않았다. 실루엣 cg정도로 처리되었다. 이런 기묘한 영상에 감정 이입하다니 역시 요즘의 시청자들은 대단하다. 나의 대역인 여성 히어로는 지극히 전형적인 순정만화 여주인공 스타일이었다. 그녀는 종횡무진 아름답게 활약했다. 그리고 자기 멋대로 제노스와의 추억을 만들어나갔다. 저게 뭔 미친 추억인지 나도 잘 모르겠다. 


 화면 속의 그녀는 아름다운 히어로로써 연애도 일도 놓치지 않고 열심히 살아나갔다. 마트 세일을 놓치지 않는 생활력 강한 모습도 보여줬다. 이것만은 좀 나랑 비슷한 것 같다. 제노스의 말대로 제노스가 죽을 뻔 한 위기도 있었다. 연인의 잔해를 끌어안고 우는 그녀의 모습은 방청객을 숙연하게 만들 정도로 처참했다. 잔해가 너무 자잘해서 거의 손에 잡히지도 않는 정도인데 흙먼지와 함께 긁어모은 그 끔찍한 가루들을 끌어 모아 안았다. 내가, 저런 연애를 했다니... 미쳤었는가... 


 연인이 살아나고 겨우겨우 일상을 회복한 어느 날, 그녀는 괴인과의 전투 중에 갑자기 머리를 벽에 쾅 처박더니 쓰러졌다. 그러더니 ‘나, 아무것도 기억이 나질 않아...’ ‘사랑하는 내 약혼자와의 모든 약속들도...’ 라고 중얼거렸다. 


 나는 웃긴 것을 보며 캔커피를 마실 때에는 주의하자고 스스로 다짐하던 중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장면을 보자마자 사레가 들렸다. 불행히도 폐에 커피 몇 방울 들어간 것 같다. 기침이 좀체로 잦아들지 않는다.




나는 방송에서 기억상실을 일삼는 도짓코 스타일의 사랑스러운 여친으로 묘사되고 있었다. 내 모습은 전혀 그렇게 생기지 않았다. 게다가 나는 전투 중에 장렬하게 벽에 머리 부딪혀서 기억을 잃지도 않았다. 그냥 고기카레 엎고 놀란 나머지 기억 잃었다. 나 스스로 한심하지만 그게 사실이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태클을 걸어야 할 지 모르겠다. 


 난 일단 남자다. 또 저렇게 툭 건드리면 박살날 듯한 나약한 이미지가 아니다. 저 여자는 엄청 큰 가슴 갖고 있지만 나는 가슴 없다. 그냥 납작하다. 대신 가슴무늬 후드 티 옷장에 갖고 있다. 제노스가 작가 측에 전달한 묘사가 얼마나 간략하면 저런 아름다운 영상이 만들어지는가. 태클 걸 구간이 너무 많아서, 그저 할 말을 잃었다. 



 ‘나... 많이 힘들지만, 기억을 찾기 위해 계속 노력할거야’ 라고 여아이돌이 말하는 시점에서 방청객 몇몇은 울음을 터뜨렸다. 방청객이 유독 눈물이 많은 족속들이긴 하지만, 좀 그럴 만도 했다. 재연배우가 워낙에 예쁘게 생겼으니까 뻔한 대사를 해도 일일이 심금을 울리는 효과가 있다. 만일 내가 저 실화 주인공이 아니라면 나름 감동받았을지도 모르겠다.


 “...”


 아...... 끝까지 봐 줄까 어쩔까.... 많이 고민됐지만, 방송을 만든 방송국 놈들 성의도 있고 화면을 끌 기력도 남아있지 않고 해서 그냥 일단 재생화면을 냅뒀다. 그랬더니 내 역할을 맡은 그 여자애는 노을을 향해 전력질주했다. 구도가 매우 아름답고 고전적이었다. 비둘기도 좀 날아갔다. 항상 궁금한 건데, 드라마의 비둘기들은 누가 어떻게 섭외하는 걸까. 강냉이를 출연료로 받는 걸까. 나는 내 처지가 도를 지나치게 황당한 지경까지 도달하니 오히려 잡생각이 들며 마음이 편안해졌다. 영상을 즐기기 시작했다.



 그 여자 아이돌은 손나팔을 만들어서 강가에 대고 이렇게 소리쳤다. ‘내가 기억을 되찾을 때까지, 우리 결혼 보류해, 기다려줘...!’ 방청객들 중에 마음 약한 사람들은 이미 오열하고 있다. 


 재연화면 오른쪽 위에는 mc 중계석의 리액션을 비춰주는 작은 화면이 있다. 그 작은 칸 안에 보이는 남자 아나운서는 흉하게 우는 중이다. 광대뼈가 눈물로 미끈미끈한 영상이 역겨웠다. 방송에 나오는 거의 모든 사람이 울고 있었다. 모두가 우는데 나는 웃고 있다. 저 배역의 실제 당사자임에도 불구하고 웃고 있었다. 웃음 중에서도 헛웃음이다. 앞으로 한 달 정도는 심심할 일 없을 것 같다. 인생이 지루할 때마다 이 영상 재생하면 그때마다 헛웃음 나올 것 같다. 개그 프로그램이었다면 좋았겠다 싶은 정도다. 특집으로 만들어진 단발성 프로그램이라 좀 아쉽다.



 영상이 끝나자 제노스의 음성은 아니지만 성우가 제노스에 최대한 이입해서 앞으로의 각오를 읽어주었다. 


 ‘일단 오로지 당신을 위해서, 결혼은 보류합니다만’

 ‘여전히 좋아합니다.’

 ‘기억이 돌아오면 그 때 다시 청혼합니다.’


 뭐하는 짓이야, 임마....!! 단박에 육성으로 반박했다.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튀어나와 버렸다. 살면서 컴퓨터 동영상 보다가 실제 목소리 내서 반박한 건 처음이다. 보통은 속마음으로 반박거리 생각하지만, 이 경우에는 너무 황당해서 반사적으로 열 받은 목소리가 벌컥 나왔다. 나는 제노스가 방송을 이용한 이유를 이제야 알게 됐다. 제노스 요즘 히어로 일거리 밀려서 바쁘니까, 메시지를 방송으로나마 완곡하게 전달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최근 들어 나는 의도적으로 제노스 이야기 들어주지 않았다. 말 걸면 무시하거나 딴소리 했다. 그래서 나와 대화할 기회도 없고 히어로 스케줄도 바쁜 제노스는 방송이라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그동안 단 한 번도 방송에 모습 비추지 않았으면서 이따위 각오 말하려고 방송 이용했냐. 재연장면 토 나오게 웃겨서 잠깐 즐겁기야 했지만, 다시는 이런 짓 안 했으면 좋겠다. 하나도 안 기쁘다.



 그나저나 제노스의 인기 순위 오른 이유 대략 알 것 같다. 동영상이 끝나서 밑의 댓글을 보니 더 확실해졌다. 방송 전반부에선 못돼처먹은 이미지를 어필한 뒤 후반부에서 자신의 애인에게는 헌신하는 갭을 보여준 것이 인기요소가 된 것 같다. 뭐 대중에게 긍정적인 방향으로 전달됐으니 다행이긴 한데... 당사자인 나로썬 어디서부터 뭘 태클 걸어야 할지도 감이 안 잡힐 정도로 황당하다. 놈은 결혼계획을 미룬다며 나를 배려하는 척 했지만, 그건 보류일 뿐이잖은가. 결국은 언젠가 나와 반드시 결혼한다는 속셈을 통보한 셈이다. 말 그대로 통보다. 프러포즈론 최악 아닌가. 


 댓글로는 왁자지껄하게 해당 사연의 여성 히어로 추측성 글이 많이 이어지고 있다. 네놈들 아마도 평생 못 찾을 거다. 왜냐하면 나는 남자고, 저렇게 생기지도 않았고, 저런 성격도 아니고, 아 뭐라고 해야 하지. 슬슬 좀 귀찮다. 그냥 웃기다. 


 이번 이슈가 지나가면 아마이가 순위 깔끔히 탈환할 것이라는 댓글도 있다. 아마이 인기 많구나. 그건 당연하다. 아까 보니까 무슨 덩치 좋은 여자 수준이었다. 저렇게 잘 생긴 사람은 돈을 좀 벌어도 된다고 생각한다. 서커스 구경하고 나면 신기한 경험 한 값으로 돈을 내니까. 같은 이유로 희한하게 생긴 사람 보고나면 구경한 값을 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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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노스는 저녁 즈음에 피투성이에 팔이 하나 없는 채로 집에 들어왔다. 사이보그니까 아마 본인 피는 아닐 거고, 괴인의 피일 것이다. 제노스는 전투 내용에 비해 몸이 많이 상하는 타입이다. 


 “방송 봤어.”

 “이렇게 빨리 보시다니 의외네요.”

 “응. 봤어.”

 “선생님의 이미지대로 나오지 않았죠.”

 “엄청 웃겼어.”


 마시던 캔커피 무심코 뿜을 정도였으니까... 라는 말은 삼켰다. 제노스가 이불 깔고 자는 자리에다 저질렀기 때문이다. 물걸레로 닦아도 약간 커피향이 나고 미묘하게 끈적거리게 됐다. 눈치 못 챘으면 좋겠는데.


 “방송국 부수고 싶었습니다만 오늘은 괴인 물리치는 데 힘을 다 썼습니다.”

 “부수지 마. 난 방송 재밌더라.”

 “선생님의 대역, 실물에 비해 귀여움 부족해서 화납니다.”

 “아니, 지나치게 귀여워서 문제던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는 제노스는 얼굴도 깨져 있었다. 방송국에 대한 불만의 핀트가 한참 어긋나 있다. 대역이 나보다 귀여움 부족하다니 제노스 머리 많이 다친걸까. 얼굴 파츠는 어떻게 바꾸는 거지. 제노스의 파손된 얼굴 흉터 부근으로 불규칙하게 형광색 전파가 감돌았다. 묘하게 걸음걸이가 부자연스럽다 싶었는데 제노스는 다리도 절었다. 무릎 관절 부분이 살짝 녹아 있다. 제노스는 통각을 느낄 수 있는걸까. 만약 느낀다면 대화는 그만두고 빨리 파츠 바꿨으면 좋겠다.


 “말씀드렸다시피 기억 돌아오면 다시 청혼합니다.”

 “돌아올 것 같지 않아.”

 “네. 그때까지 기다려 드리겠습니다.”

 “시끄러.”

 “기다립니다.”

 

 제노스는 내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이 덤덤했다. 그리고 파츠를 바꾸러 조용히 사라졌다. 실은 기억이 돌아올 리가 없으니까. 뭐 괜찮은가... 싶기도 하다. 명분 상 아직 사귀는 상태인 건 찝찝하지만 나는 강하니까 성추행 당할 리는 없다. 그건 무척 다행이다. 


 다만 조금 궁금한 것이 있다. 내가 위쪽인지 아래쪽인지 모르겠다. 전혀 기억에 없다. 제노스의 서술을 종합하고, 추측해본 바 내가 아래쪽인 것 같은데. 만일 예감이 맞다면 두렵다. 나는 왜 그런 짓 당할 때 제노스 부수지 않았을까. 당시 얼마나 사랑했으면 내 몸 만져대는 남자를 내버려뒀을까. 또, 제노스는 그렇고 그런 기능도 있었단 말인가? 대체 어떻게 그런 기능 만들었냐고 질문하면 또다시 추억상자 테이핑 박박 뜯어낼까봐 굳이 물어보진 않았다. 혼자 추측하는 것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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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동안 제노스는 더 바빠졌다. 본의 아니게 사고를 쳤기 때문이다. 내게 메시지 몇 줄 전하고 싶은 의도였겠지만 방송국에서 멋대로 재연배우까지 써서 보도했다. 제노스는 한동안 히어로 스케줄 외에도 파파라치 피해 다니느라 열받아했다. 아. 지금쯤 그 재연배우 여아이돌 뭐 하고 있을까. 본인이 A급 히어로 대머리 망토의 대역을 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을까. 영원히 그 사실 모르겠지만. 알려주고 싶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고. 텔레비전에 비슷한 연령대의 여아이돌 보고 있자니 잡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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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에게 휴대폰이 있었음을 알게 된 것은 마트에서다. 파카를 입고 장을 보는 중에 무심코 파카 주머니에 손을 넣자 딱딱한 휴대폰이 만져졌다. 


 아마 과거의 내가 주머니에 넣어두고 방치했을 것이다. 휴대폰은 꺼져 있다. 켜니까 배터리 충분히 남아있다. 쇼핑카트를 밀면서 정육 코너 앞에서 이런 저런 기능을 만지며 익히다 보니 꽤 재미있어서, 결국 간이 벤치에 걸터앉아서 본격적으로 휴대폰을 뒤지기 시작했다. 장 보는 도중이었는데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인터넷 사용하는 방법은 잘 모르겠고 메일함 부터 확인했다.


 나는 히어로들과도 간혹 대화를 나눴고, 역시 제노스와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눴다. 나는 단답형으로 답장하는 편이었다. 그에 비해 제노스는 매우 자주 메일을 남겼다. 통화 내역에도 제노스가 많이 찍혀 있다. 주로 수신이었다.



 [몸은 좀 어떠신가요]

 12:38


 [소닉은 F시 부호 제니르 소속이라는 정보를 얻었습니다만 우리와는 상관없겠죠]

 16:01


 [날씨가 추워서 외출하실 때마다 걱정됩니다]

 20:50


 [부디 외투를 입어주세요. 목도리를 하신다면 더 좋습니다]

 08:00


 [배추전골 끓였습니다]

 18:31


 [최근 바꾼 파츠로는 출력의 리미트가 해제된 느낌이라 좋습니다]

 20:05


 [메탈 나이트는 주시하고 있습니다]

 11:50


 [용龍급 괴인이 출현했습니다만 전율의 타츠마키에게 처리됐습니다]

 13:46


 [내일 오전에 타임세일이 있습니다]

 14:01

 

 [음료는 이벤트 품목에 한해 편의점이 더 저렴한 경우도 있습니다]

 14:22


 [저는 이번 일에 협회의 사무 이외에는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17:37


 [오늘은 협회에서 불러서 먼저 나가겠습니다]

 09:04


 [뱅의 도장에서 호출이 있습니다]

 14:28


 [좋아합니다]

 18:09


 [그런 대답은 처음이라 조금 웃었습니다]

 18:11


 [변명은 아니지만 히어로 협회 브리핑이 길어졌습니다]

 20:50


 [브리핑은 생각보다 별 내용 없었습니다. 죄다 수박 겉핥기입니다]

 20:55


 [오늘 저녁은 카레 준비해두었습니다]

 17:15



 스크롤을 내리는데 광고성의 스팸 메일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제노스의 메일이다. 정말 사귀긴 사귀었구나 실감 날 정도로 많은 수신 메일 목록이 있다. 개수가 천여 개가 넘었다. 꼬박꼬박 하루도 빼놓지 않고 자주 메일한 모양이다. 집요할 정도로 자주 수신되던 메일이 카레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멈춰 있다. 왠지 우울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무감각한 편이라, 지금까지의 사태에 단 한번도 슬프지 않았다. 그런데 과거의 내 전자정보를 훔쳐보고 있자니 문득, 슬퍼졌다.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슬픔이라는 생소한 감각이 갑작스레 찾아온다. 내가 알지도 못하는 과거의 제노스가 막연하게 그리운 기분이 든다. 나는 과거의 제노스를 모른다. 그런데도 그가 보고 싶어진다. 처음에는 조작법을 익히는 게 재미있어서 휴대폰 갤러리까지 죄다 열어볼 작정이었지만 점점 갤러리를 볼 용기가 사라진다. 메일함만 봐도 충분히 우울하다.


 카레 따위 엎어서 이렇게 된 상황이 웃기다. 한심하고 웃긴데도... 이유 모르게 제대로 웃을 수가 없다. 몇몇 메일은 보자마자 말도 못하게 엄청나게 괴로워져서 휴대폰을 도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너무 행복해서 무서울 정도입니다]

 20:32


 [저의 남은 생이 행복할 이유 없는데도 행복해서, 벌 받을 것 같습니다]

 2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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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번에 아마이가 내가 맡았어야 할 괴인을 먼저 처리한 탓에, 뒤늦게 도착한 나는 허탕을 쳤다. 괴인을 쓰러뜨릴 기회를 빼앗겼다. 정기적으로 괴인을 무찌르고 나면 뭐랄까 개운한 성취감이 있다. 한 건 했네- 하는 뿌듯함이 있는데, 그 취미활동의 상쾌함을 지난번에 못 느껴선지 영 일상이 답답했다. 


 무료한 나머지 엎드려서 신문의 십자말풀이를 푼다. 오늘 신발장 청소를 하다 보니 구두 안에 끼워둔 신문지에서 십자말풀이 부분이 보였다. 신문지의 게임 부분만 살짝 찢어서 펼쳤다. 조금 구겨져 있었지만 그래도 건드린 적이 별로 없어서 인쇄 내용이 확실히 보인다.



 옛날 십자말풀이를 풀어봤자 정답을 응모하고 경품을 받을 순 없다. 하지만 지금은 경품을 목적으로 푸는 게 아니다. 단지 너무나 심심해서다. 십자말풀이는 순조롭게 그럭저럭 잘 풀렸다. 다만 세로퀴즈 한 개가 풀리지 않았다. 한 개 남기고 그만두면 왠지 찝찝하니까 인터넷 검색의 힘을 빌려서라도 풀고 싶다. 그래서 노트북 켰다. 정말로 해답만 찾고 노트북을 끄려 했는데 포털 사이트 메인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지옥의 후부키.’


 그 여자 얼굴이 왜 포털 사이트 메인에 올라와 있는 거지. 클릭해보니 제노스의 연인에 대한 추측성 기사였다. 유력한 후보 중 한명으로 후부키가 올라 와 있었다. 이건 뭔 개소리지. 후부키는 지난 번 연말 파티에서 잔뜩 취해서 와인 병을 제노스의 어깨에 내려친 여자다. 와인 많이 쏟아져서 피 같았다. 그래서 S급 히어로들 고어 영화 보는 기분으로 즐거워했다. 이 그룹 인간들은 대체로 미친 놈들이다. 제노스야 사이보그라 전혀 안 다쳤지만, 후부키와 서로 죽여버리겠다고 으르렁댔다. 먼저 잘못한 후부키는 왜 화내는지 모르겠다. 술에 취하면 참 재미있어지는 여자다. 그런데 그런 후부키가 제노스의 연인으로 캐스팅되다니. 언론이 뜬구름 잡는 것이 재미있어서 스크롤을 계속 내렸다.


 후부키는 히어로순위 B급 1위에다 아름다운 외모, 강인한 생활력을 가졌으므로 제노스의 연인 묘사와 맞아떨어진다는 게 추측성 기사의 내용이다. 턱을 괴고 스크롤을 계속 내렸더니 후부키 그룹 관계자들이 펄쩍 뛰며 열받아하는 인터뷰 사진이 있었다. 그럴 만도 했다. 얘네 그룹 애들 후부키 엄청 좋아하니까 말이지. 거의 아이돌이라고.


 다른 추측성 글에는 ‘스팅거’가 추천되고 있었다. A급 10위의 남자다. 스크롤을 내렸더니 더러운 팬픽션 따위 공개적인 포털에서 꾸며내지 말라고 뭇매를 맞고 있었다. 인터넷에는 프리즈너들이 많구나. 추측성 글이 너무 많기에 슬슬 흥미를 잃었다. 인터넷 사람들은 나를 제외한 거의 모든 히어로를 제노스와 매칭시키며 놀고 있었다. 할 일 없는 인생들이다. 나는 십자말풀이에서 궁금한 부분을 검색해서 찾고 노트북을 덮었다. 오늘은 초콜릿 푸딩을 먹을까 싶다. 





 지갑을 열어보니 초콜릿 푸딩을 사고 오는 길에 베이커리에 들러서 빵을 살 정도로 넉넉하게 돈이 있다. 오늘 끼니는 빵으로 할까. 이번 주 내 내 쌀밥 먹었으니까 빵을 떠올린 건 꽤 좋은 아이디어다. 후드를 걸치고 파카를 입는다. 목도리도 꺼내서 둘렀다. 털장갑도 낄까 싶었지만 찾지 못했다. 장갑 찾는 걸 포기하고 그냥 나왔는데, 파카 주머니에 손을 넣어보니 장갑이 들어있어서 기분이 좋아졌다.


 집에 피자치즈와 토마토가 있으니까 식빵만 새로 사서 피자빵을 만들어야겠다. 피자빵은 대충 만들어서 렌지에 돌리기만 해도 맛있다. 하지만 토핑 은근히 귀찮으니까 완성되어있는 피자빵이 저렴하면 그걸 살 것이다. 또 고로케도 사야지. 소시지 많이 끼워주는 베이커리가 가까워서 좋다.



 밖에 나오자 지난번에 봤던 그 고양이가 쓰레기통 옆에서 고롱고롱 졸고 있다. 품에는 작은 아기 고양이들이 가득하다. 벌써 낳았구나. 워낙 말라서 그게 만삭인줄도 몰랐다. 고양이들의 엉덩이마다 앙상한 꼬리가 붙어있었다. 꼬리는 각기 별개의 의식을 가진 생물체처럼 자기주장을 하며 꼬물댔다. 오는 길에는 고로케 포기하고 고양이용 캔참치 하나 살까. 고로케 먹고 싶은데. 아니 두 개 다 살까. 


 고민하며 걷다보니 금방 마트에 도착했다. 두 개 다 사야지. 결심하며 들어왔는데 마트 안은 초토화가 되어 있었다.





 걀걀걀걀. 이상한 소리로 웃는 괴인의 생김새는 최근에 본 괴인 중 가장 괴랄하다. 뼈 밖에 남지 않은 조류의 외형을 가진 괴인이었다. 푸딩 코너는 거의 다 박살났다. 푸딩의 내용물들이 엎어져서 엉망이다. 푸딩은 으깨지면 좀 역겨운 모양새가 된다. 내 입으로 들어갔어야 할 푸딩들이 박살난 것을 보자 화가 났다. 무려 어제부터 푸딩 먹고 싶었는데.


 “죽여버린다.”


 나는 장바구니를 옆에 툭 던지고 괴인에게 다가섰다. 괴인은 천장의 전등을 뽑아내는데 열중해서 내 말을 들은 것 같지도 않았다. 털장갑에 피 묻으면 손빨래 귀찮으니까 장갑을 벗어서 주머니에 접어 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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