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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노사이] 카레를 엎은 날 2 
작성일시 : 2016. 1. 8. 00:58 | 분류 : 장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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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이 갑자기 추워져서 얼마 없는 겨울옷을 도로 꺼내야하나 걱정했다. 별 것 아닌 작업이긴 하지만 매우 귀찮다. 살아나가기 위해 해야만 하는 불가피한 생존활동 전반이 귀찮다. 생존활동이기 때문에 피할 수 없다는 점이 싫다. 강제성은 나를 무기력하게 만든다. 


 인생이란 평생에 걸친 밸런스 유지 활동이다. 나는 피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욕구가 언제나 정상치에 있도록 관리해주는 최고관리자 역할을 맡은 것이다. 식욕이 내 목을 조르면 허둥지둥 위장에 밥알 무더기를 채워 넣는다. 그러면 식욕이 내 목을 놔 준다. 다른 욕구들도 가만히 있지 않으므로, 그들까지 내 목을 조르지 않도록 노력한다. 그리고 그걸 평생 반복한다. 생명활동은 뭐 항상 그런 식으로 빚쟁이에게 부득부득 쫓기는 느낌인 거다. 나는 되도록 에너지 낭비하지 않는 선에서 빚쟁이들을 적당히 달래며 살아가고 있다. 




 기억을 잃어버린 이번 겨울도 그렇게, 지금까지처럼 그럭저럭 살아나가자는 마음이다. 카레를 엎은 정도로 반년의 기억을 잃은 점은 좀 창피하다. 제노스 외의 누군가가 알게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무래도 기억상실의 계기가 사소한 정도가 지나치다. 드라마에서 배운 바 기억상실증은 괴한에게 머리를 세게 부딪혀 자빠지는 정도는 되어야 한다. 아니면 평생 모르고 지냈던 쌍둥이를 마주치는 정도가 되어야 한다. 나의 경우는 고기를 많이 넣고 끓인 카레를 엎고 자신의 죄에 경악해 기억을 잊었다. 어째 좀 이상하다. 하지만 그게 나답다는 생각이 들어서 왠지 납득했다. 


 허무한 기억상실 사건 이후 앞으로의 일상에도 크게 달라질 것은 없다. 언제나처럼 내 안에서 나를 괴롭히는 생존욕구라는 이름의 빚쟁이들을 달래주며 근근이 살아나갈 것이다. 나도 모르는 새 한번 사귀어 주었던 제노스에겐 미안하지만, 나는 제노스를 사랑하지 않는다. 딱히 싫어한다거나 미워하지도 않는다. 사귀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전보다 그 애를 대할 때 마음이 불편해진 건 있지만. 싫어지지 않았다. 선생님이라고 모시며 그렇게나 따르는데 내칠 이유가 없다. 그러나 함께 있는 게 달갑지도 않다. 말 그대로 싫지도 좋지도 않다. 히어로의 자질이 있는 좋은 놈이라고는 생각한다. 하지만 그저 그 뿐이다. 




 겨울옷을 꺼내려고 옷장을 열었다. 나는 옷장을 열자마자 할 일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과거의 내가 계절에 맞춰서 옷 정리를 모두 해 놓았다. 어쩌면 과거의 제노스가 했는지도 모른다. 나도 모르는 새 끝나있는 집안일을 보는 기분이, 약간 오싹했다. 내가 모르는 새 끝내버린 집안일들은 얼마나 있는 걸까. 


 그간 제노스가 과거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적당히 말을 돌리거나 말허리를 끊어먹었다. 왠지 내가 모르는 내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다. 그리고 제노스가 묘사하는 우리 두 사람의 애정행각은 비위가 상했다. 의도적으로 제노스와 이야기를 나누지 않은 지도 이틀이 넘은 것 같다. 그렇지만 겨울옷 이야기 정도는 미리 들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싶다.


 “제노스.”

 “예, 선생님.”


 나는 그냥 제노스가 있는지 확인하려고 이름을 불렀을 뿐인데 득달같이 내 옆에 와서 앉기까지 했다. 무슨 음식점 호출 벨이라도 누른 줄 알았다. 시답잖은 이야기 하려고 했는데, 이렇게 전력을 다해서 반응하면 부담스럽다.


 “별 이야기 아니야.”

 “괜찮습니다. 말씀하세요.” 

 “겨울옷은 과거의 내가 꺼내놓은 거야?”

 “네.”

 “아... 그랬냐...”


 제노스는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 했다. 나는 그게 왠지 불안해서 내심 안절부절 못하는 지경이 되었다. 또 내가 모르는 추억거리를 하나하나 말해줄까 봐. 그리고 그 예감은 곧 적중했다.


 “선생님께서 옷 정리는 직접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 역시 내 옷이니까.”

 “그도 그렇지만 사귀고 난 이후 우리는 서로 옷은 건드리지 말자고 약속 했었습니다.”

 “왜 그랬는데?”

 “그야 오래 사귀고 싶으니까요.”

 “오래 사귀고 싶은데 왜 옷을 건드리면 안 돼?”

 “그 이유는 비위 상하실테니 말하지 않겠습니다.”

 “아니. 이건 궁금해. 왜 건드리면 안 되는데?”

 “옷이 섞여서 다투기라도 하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저야 옷이 섞였다고 화낼 리 없지만, 선생님이 먼저 걱정했습니다. 평소 매사 대범하신 분이 의외로 사소한 부분에서 걱정 앞서나가셔서, 귀여웠기 때문에 내버려뒀습니다.”

 “으... 정말 비위 상한다 야.”

 “그렇게 말하실 줄 알았습니다. 아니 그런데 저희 정말 진지했습니다.”


 제노스는 상처받은 눈을 하고 있었다. 금빛 눈동자가 불안하게 이리저리 흔들렸다. 좀 미안해졌지만 내 딴에는 진심으로 비위가 상하는 걸 어떡하라고. 과거의 나는 왜 그랬을까. 정말 속이 메슥메슥했다. 우리는 그렇게 유리같이 섬세한 우려까지 해 가면서 사귀었단 말인가. 제노스는 이때다 싶었는지 또 자기 멋대로 추억상자 열어서 이것저것 중얼대기 시작했다. 난 저 놈의 추억상자가 너무 싫다. 영원히 밀봉해 버렸으면 좋겠다. 너무 많이 감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테이프 여러 겹 감아야한다. 망할 상자. 제노스에게 내 소름을 무선 조종하는 재주가 있는지 전에는 몰랐다. 게다가 제노스 저 자식 추억보정으로 멋대로 과장하는 게 분명하다.


 “옷이 바뀐 적이 있었어?”

 “단순 해프닝이었지만 선생님이 자고 일어난 뒤 춥다고 제 옷을 걸쳐 입은 적 있었습니다.”

 “난 그런 거 안 헷갈려. 그리고 난 두꺼운 잠옷 입고 자.”

 “물론 잠옷을 입고 계셨었지만 제가 벗겼습니다.”

 “으, 으아악.... 으아악....”


 나는 과거의 내가 공포스러운 지경에 이르렀다. 과거의 나 임마! 제노스가 내 옷 벗길 때 왜 얌전히 있는거냐! 발로 차서 제노스 부순다던지, 싫어요 싫어요 싫어요 세 번씩 외쳤어야지! 그리고 경찰서 가서 진지하게 조서 썼어야 했다. 반드시 제노스 콩밥 먹였어야 했다. 프리즈너 녀석과 함께 가뒀어야 했다. 두 사람 게이니까 높은 확률로 화목하게 지낼 것이다. 나는 벅벅 마른세수를 하며 괴로워했지만 제노스는 이미 센치하고 약간 수줍은 느낌으로 당시의 행복한 일상을 서술해대고 있었다. 


 “귀여웠습니다, 제 옷을 입은 선생님.”

 “...”

 “그렇게나 자각도 없이... 사랑스러웠습니다.”

 “...”

 “제 옷 입은 모습 너무 귀여워서, 다시 벗기긴 했지만요...”

 “아니 사람이 옷을 입고 있게 내버려 둬 좀.”


 나는 엽차가 든 잔이 옆으로 왈칵 넘어질 정도로 책상을 강하게 쳤다. 일상모드라 힘을 줄여서 쓰고 있는 참인데도 책상에 금이 좀 가버렸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모닝 섹스 했습니다만...”

 “...”

 “선생님이 오후가 되기 전에 또 슬슬 일어나서 제 옷을 다시 입으셨습니다.”

 “과거의 나는.... 학습 능력이 없는건가...”

 “아무튼 그래서 저는 또 벗겼습니다.”

 “사람이! 옷을 멀쩡히 입고 있게 내버려 두라고 좀!”


 과거의 나 엄청 추워보여! 의복 제대로 갖춰 입은 묘사 드물다고! 나는 책상을 한번 더 쳤다. 안 그래도 쏟아져 있던 엽차 잔이 제대로 굴러서 바닥에까지 떨어졌다. 잔이 데굴데굴 굴러서 제노스의 옆으로 갔다. 제노스는 그 때의 추억에 젖어선지 표정이 말도 못하게 행복해 보였다.


 “엄청 해댔네, 우리.”

 “예.”

 “지치지도 않냐?”

 “예.”

 “앞으론 절대 그럴 일 없을거야.”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냐! 짜샤!!!”




-





 겨울옷 정리 일정이 사라지자 놀라울 정도로 한가해졌다. 저녁밥 만들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제노스가 부엌에서 뭔가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음식의 양이 평소보다 많고 미묘하게 호화스러운 것 같았다. 꼬치구이라니, 끼니로 먹기에는 좀 어긋나는 감이 있다. 제노스, 꼬치당 피망 두 개 이상 끼우지 마라... 마음속으로 무전신호를 보냈으나 듣지 못했는지 제노스는 피망을 세 개 끼우고 브로콜리도 꽂았다. 야, 고기 끼우라고 고기. 


 처음에 꼬치구이는 그러려니 했는데 곧 음식 배달이 왔다. 제노스는 요리를 그럭저럭 잘 하는 편이었지만 저녁까지 시간이 한정되어 있다보니 다른 메뉴는 배달을 시킨 것 같다. 그런데 배달원이 꺼내는 음식의 양이 좀 지나치다. 그리고 엄청 비싸 보인다. 만화틱한 칠면조가 있기에 흠칫했다. 그리고 초밥도 있었다. 단순 배달 초밥이라기엔 제대로 품격이 있어 보였다. 초밥은 좋네. 그런데 칠면조랑 초밥은 대체 무슨 조합이냐, 뷔페냐고... 이제 태클도 좀 지치는 것 같아서 그냥 앉아만 있었다. 배달원은 좁은 맨션으로 많은 음식을 옮기느라 애를 먹었다. 복도를 분주하게 오갈수록 집에 음식은 쌓여갔다. 막판에는 이 음식들로 뭔가 창업을 해도 될 것 같은 분위기가 되었다.


 마지막에는 브랜드 이름이 적힌 아이스크림 기계까지 들어왔다. 바퀴가 달린 아이스크림 기계 옆에는 스쿱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제노스 이 자식 적당히란 단어 모르는 건가... 저녁밥이라고...


 “곧 후부키 그룹과 S급 히어로들이 옵니다.”

 “뭐???? 왜?”

 “최근엔 저와 말 나누는 걸 매우 싫어하셔서, 지금에야 말합니다.”

 “이런 중요한 건 말 좀 해. 왜 온대?”

 “소소한 연말 파티입니다.”

 “우리가 걔네랑 그 정도로 친했었나.”

 “친했습니다.”


 반 년은 정말 무서운 세월이다.


 “친해도 부르지 마. 내 맨션 좁은데 그 인원 다 들어올 수 있겠어?”

 “저야 선생님과 연말 오붓하게 지내고 싶어서 말렸지만 선생님이 모두 초대했습니다.”

 “진짜 친했나 보네..”

 “예. 두루 친했습니다. 말은 안하지만 서로 미운 정 들어있었습니다.”


 제노스의 말을 들어보니 나는 힘을 인정받아 S급 회의에도 자주 참석했다고 한다. 히어로들끼리 연말 파티를 계획할 정도로 친분이 있었다.


 “대머리!”


 찢어지는 듯 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리고 이어서 신경질적인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전율의 타츠마키임이 분명하다. 문을 열자 S급 히어로 전부는 아니지만 일부 참석했고, 안면이 있는 무면허 라이더도 있었다. 킹은 그 중에서도 반가웠다. 재미있는 친구라고 생각한다. 많은 인원이 맨션 안으로 우르르 쏟아져 들어왔다. 프리즈너도 있었다. 어깨 근육 너무 큰데 입구는 좁아서 옆으로 몸 돌려서 간신히 들어오는 것 같았다.


 “킹, 내가 빌려간 게임 팩 돌려줬어야 했는데.”

 “무슨 게임?”

 “분홍색 배경에 파란 다이아 그려져 있는 게임.”

 “그거 우리 다 클리어 했었어. 그리고 자주 하니까 지겨워서 이제 그 게임 그만하기로 했잖아.”


 그랬었나.. 당황하고 있는데 제노스가 대신 말문을 열었다.


 “선생님은 반 년치 기억을 잃으셨다.”

 “...”

 “...”


 왁자지껄하던 연말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모두가 이 쪽을 보고 있었다. 


 “거짓말.”

 “나도 이 모든 게 거짓말이었으면 좋겠지만. 선생님은 나와 사귀던 사실도 잊으셨고, 너희와 친해졌던 것도 모조리 잊으셨다.”

 “안 친했거든. ”

 “초대받아 와 놓고 뻗대지 마라, 망할 꼬맹이.”


 제노스는 말은 그렇게 해도 그다지 진심으로 기분 나빠 보이진 않아보였다. 타츠마키는 깡통, 이라고 씹어붙이면서 입 꼬리는 약간 웃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친했던 거구나 우리는. 대략 잃어버린 반 년의 분위기가 추측이 갔다. 타츠마키는 흥 하고서 샴페인을 홀짝였다. 샴페인도 있었구나. 나는 금빛 샴페인을 따라 마셨다. 후부키도 식전에 목 축일 겸 한 잔 하는 것 같았다.


 “선생님은 최근에 큰 충격을 받으셨다. 그리고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무슨 충격을 받았는데?”


 후부키가 묻자마자 제노스가 입을 열고 ‘카레...’까지 말했다. 제노스의 발음은 너무나 쓸데없이 정확해서 모두가 집중해 듣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제노스의 입을 막았다. 


 “카레이싱! 난 카레이싱 도중에 머리를 부딪혀 버렸어!”

 “오! 청춘이구나 사이타마.”

 “엄청 안 어울려.”

 

 한동안 카레이싱 관련 잡담으로 왁자지껄했다. 무면허 라이더는 카레이싱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기 때문에 화제는 순식간에 바뀌었다. 나의 순발력에 박수를 쳐 주고 싶다. 동제는 긴가민가 하는 표정이었지만 어쨌든 대부분 속였다. 그거면 된 거다.


 한동안 내 기억상실에 대해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모두들 쿨한 성격이어선지 너무 오랫동안 그 주제로 떠들어대거나 동정하진 않았다. 그런 일이 있었다면 안됐네. 라는 반응에서 크게 더 나아가지 않았다. 히어로들은 동료의 팔다리 잘리는 것이 일상인 이상한 인물들이라 정신적 외상으로 인한 스트레스 장애 정도야 그러려니 하는 것 같았다. 반년의 기억상실이면 목숨을 걸고 싸우는 히어로치고 사소한 사고에 불과하다. 다만 타츠마키가 상당히 웃었다. 남의 불행에 즐거워하지 마라. 




 연말 파티는 즐거웠다. 다들 나에게 전보다 친하게 굴어서 좀 이상하긴 했지만, 그야 내가 기억을 잃었기 때문이니까 내버려 두었다. 사실 좀 기분이 이상하긴 했다. 나도 친구 있었구나 싶고.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반 년간의 나는 행복했구나. 그리고 연말파티 초대하면 다들 와 줄 정도였구나. 그랬구나. 그랬었구나. 



 좁은 맨션에 있던 음식들은 놀라운 속도로 사라져갔다. 처음엔 다 먹을 수 있는지도 의심스러웠는데. 절반이 사라졌는가 싶더니 곧 바닥을 보였다. 후부키 그룹의 부하직원들은 용케 복도까지 낑겨 앉아 음식을 전투적인 기세로 먹어치우고 있었다. 저 놈들은 정말 먹으러 온 녀석들 같다. TV에서는 오랜만에 괴인의 습격도 없는 평화로운 연말이라며,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상투적인 덕담을 해 주고 있었다. 


 나는, 이 사람들은... 친했었구나. 왠지 기쁘면서도 그 과정을 내가 모르는 점이 묘하게 외로웠다. 아... 나는... 이 사람들은... 그랬구나.... 그랬었구나... 친했었구나... 


 협회에 관련해서 근황을 나눌 때에도 나는 잠자코 있었다. 전부 모르는 이야기였다. 한 마디도 거들 수가 없었다. 제노스는 나와 있을 때 말고는 과묵하거나 호전적인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동료들과 근황을 나누는 모습은 꽤 친해 보였다. 심지어 대화중의 제노스는 얼핏 웃기까지 했다. 물론 소리내서 웃진 않았지만. 건배를 할 때는 눈에 띄게 빙그레 웃었다. 제노스, 반년이란 세월은 대체 너에게 무슨 짓을 한 거냐. 내가 고기카레를 엎었을 때에는 소리까지 내서 웃었잖아. 너도 변했구나.


 그렇게나 행복하다는 듯이, 영문 모르고 지켜보는 사람이 상대적으로 쓸쓸해질 정도로 기분 좋게 웃고 말이야...





-





 또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밖은 캄캄해졌다. 요즘은 눈이 자주 내리는 것 같다. 그도 당연한 것이 나를 소외시키고 계절이 멋대로 바뀌어 버렸기 때문이다. 눈이 내리는데도 날이 맑은 밤이라선지 별이 총총히 보인다. 전골이 졸아드는 냄새가 나기에 가스버너를 껐다. 곧 후부키가 취해서 엎드렸다. 타츠마키가 그걸 보더니 이만 다들 돌아가자고 성화였다. 오늘 밤 새러 온 거 아니었어? 킹이 게임 콘솔 기기를 연결하다가 아쉽게 뒤돌아봤다. 


 “아니, 그리고 우리 적당히 자리 비켜주기로 했었잖아?”

 “맞아.”

 “제노스가 그 조건으로 우리를 불렀지.”

 “약속을 어기면 안 되지.”


 다들 고개를 주억주억 하더니 소지품을 챙기기 시작했다. 에나멜한 질감의 핸드백은 후부키의 것 인줄 알았는데 프리즈너가 챙겨들었다. 다들 약간 알딸딸해서는 느릿느릿한 움직임으로 나갈 채비를 했다. 제대로 다 놀지도 않은 것 같은데 다들 외투 챙겨 입고 있다. 


 “일 년 중 하루만이라도 안전한 새해 보내라고.”

 “너야말로 내년에는 제대로 죽으렴.”

 “...”


 저게 덕담인지 가벼운 이지메인지 헷갈린다. 왜 새해부터 명복을 비는 거지. 아무튼 나는 이런 격렬한 친분 어색하므로 잠자코 있었다. 약간 반어법 같은 건가. 


 “그리고 제노스는 선생님과 행복한 시간 보내야 하니까 말야.”


 프리즈너가 끔찍한 말을 남기더니 손을 살랑살랑 흔들며 사라졌다. 그 말에 왁자지껄 웃어대는 무리들의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려왔다. 우리 되게 공식적인 커플이었구나... 쪽팔려 죽겠다...


 “...”

 “...”


 제노스는 한동안 가만히 서 있었다. 그리고 복도의 난간 너머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가로등 불빛에 동료 무리들이 일렁일렁 사라져 가는 뒷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조용히 돌아와서는 연말 파티의 잔해를 치우기 시작했다. 나도 도우려고 했지만 제노스는 그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눈은 계속 내렸다. 










 “선생님.”

 “응?”

 “다시 큰 충격을 받으면 기억이 돌아오지 않을까요?”

 “기억 되돌리고 싶지 않은데.”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도 모를 정도로 난장판이 깔끔하게 정리된 방에서 제노스가 물었다. 그리고 만화잡지를 읽고 있던 난 고개조차 들어보지 않고 단칼에 거절했다.


 “기억 돌아오면 절대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저희 행복했습니다.”

 “난 지금이 더 행복해.”

 “그, 그런...”

 “지금의 평화 깨고 싶지 않은데?”

 “다시 고기카레를 만들어서 엎어보면 어떨까요.”

 “엎기 위한 카레 따위 만들고 싶지 않아.”


 제노스는 정말 간절해 보였다. 그렇지만 나도 돌아가지 않으려고 거의 발버둥이었다. 기억이 돌아올까 봐 두렵다. 내가 모르는 나를 알고 싶지 않다. 제노스를 사랑하는 내 모습은, 취업 외의 큰 고민 없이 살아온 내 인생의 오점이 분명하다.


 “카레는 제가 만들겠습니다.”

 “그러면 엎었을 때 별로 충격적이지도 않을걸.”

 “하긴 그렇겠군요.”

 “헤어졌다고 생각해. 지금부터 정식으로 차줄까?”

 “잘못도 없이 차이는 겁니까.”

 “미안하지만 그렇게 되네.”

 “카레라도 다시 엎어보고 차이면 안될까요.”

 “그 놈의 카레...”


 내가 한숨을 쉬면서 만화잡지를 덮었다. 이런 식의 대화도 질렸다. 그래서 요즘은 제노스와의 대화를 피하려는 것이다. 나는 다음 호의 만화잡지를 펼쳤다. 턱을 괸 채로 페이지를 넘겼다. 이전 호보다 타나카군 여친이 꽤 야해졌네, 서비스신 요청 받았나, 라는 잡생각 정도만이 머릿속에 지나갔다. 제노스는 전력으로 기억상실증 치료하자고 제안하는 것 같았지만 관심 없었다. 차라리 기억상실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말까지는 안 하려고 했지만, 선생님이 저를 먼저 좋아하셨습니다!”

 “뭐!!!”


 갑자기 나는 턱을 괴고 있던 손이 어긋나며 넘어졌다. 퍼드득 자세를 고쳐 앉았다. 경악스러웠다. 내가 먼저 좋아했다니? 내가? 내가? 내가 왜? 내가 제노스를? 그것도 먼저? 웃기지 마!



 “고백은 제가 먼저였지만 선생님이 절 먼저 좋아하셨습니다!”

 “거짓말 치지 마! 네가 내 마음을 어떻게 알아!”

 “직접 말씀해 주셨었습니다!”

 “야!!! 추억 보정해서 없는 사실 마구 꾸며내지 말라고!”


 제노스는 기다렸다는 듯 자신의 노트 중 두 권을 꺼내서 보여주었다. 노트 한 권의 제목은 정갈한 글씨로 ‘사진 스크랩북’ 이라고 쓰여 있었다. 이 녀석 앨범파가 아니라 수작업 스크랩 파구나. 소녀스러웠다. 스티커 따위는 붙여져 있지 않은 구성이지만. 다른 노트 한 권의 제목은 ‘약속 노트’ 라고 적혀 있었다.



 사진 스크랩북에는 정말 우리가 평범하게 사귀는 사진이 가득했다. 합성도 아니었다. 그냥 진짜 사진들이었다. 날짜도 작은 글씨로 제대로 박혀있었다. 조작 같을 정도로 다정해 보였지만 조작이 아니었다. 주로 제노스가 먼저 사진을 찍자고 다가오는 모양새였지만, 딱히 내가 밀어낸다거나 하는 느낌이 아니었다. 데이트 갈 때마다 제노스가 일상기록용으로 찍은 것 같았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우리는 연인 같아보였다. 어제 놀러왔었던 히어로들 사진도 조금 있었다. 내 사진에 비하면 매우 적은 양이었지만. 우리는 모두 자연스럽게 친해보였다. 


 내가 뒤를 돌아보는 찰나의 독사진도 있었다. 얼굴이 흐릿하게 흔들려 있었지만 표정은 제대로 웃고 있었다. 분명 사진을 찍고 있는 제노스도 웃고 있었을 거다. 




 사진 스크랩북이야 현실감이 와 닿아서 충격적이긴 해도 어느 정도 예상범위였지만, ‘약속노트’ 라는 것은 내게 있어 거의 재앙과 같은 수준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제노스는 약속 노트의 믿을 수 없는 항목들을 내게 하나하나 소리 내어 읽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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