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rgories
Admin : New post
Guestbook
  [제노사이] 카레를 엎은 날 5 
작성일시 : 2016. 2. 2. 07:59 | 분류 : 장편






-







 괴인을 죽이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언제나처럼 그저 한방이다. 마트의 절반을 작살내고 겔겔거리는 저 녀석 죽여야지 마음먹고 팔 움직였다 싶으면, 어느 새 괴인은 멀어져있고 내 장갑에는 검정에 가까울 정도로 붉은 점액질이 묻어있었다. 기가 막힐 정도로 시시하다. 앞으로 나는 싸움에서 예상외의 열세에 몰리는 반전 영원히 없는 걸까. 


 공기 중에 잔존하는 충격파가 내 볼을 경락하듯이 살짝 살짝 밀어내는 여운을 느끼며,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이번 괴인 처치로 내가 얻은 것은 전혀 없다. 오히려 푸딩을 잃었다면 잃은 상태다. 오늘 꼭 먹고 싶었는데.



 나는 장애물이 되어버린 야채들을 밟지 않도록 조심조심 걸어서 푸딩 코너로 이동했다. 아니나 다를까, 아직 터지지 않은 멀쩡한 푸딩들이 남아 있다. 괴인 처치해준 수고비 겸 조금 챙겨도 괜찮지 않을까. 사실 경찰 놈들, 현장 정리하면서 이 푸딩들 죄다 버릴 테고. 마트 주인도 괴인 처치해준 사례 겸 푸딩 챙겨주고 싶다고 사정할 게 뻔하다. 아니 뻔한 정도가 아니라 실은 내게 줄 게 틀림없다. 내가 한사코 거절하는데도 아득바득 내 손에 쥐어주는 그림이 그려진다. 나는 멀쩡한 푸딩들을 비닐봉투에 20개 정도 주워 담았다. 푸딩을 사례로 주어서 고맙다는 뜻으로 텅 빈 계산대 쪽을 향해 대충 거수경례했다.


 겉 부분에 묻은 다른 푸딩의 잔해만 닦으면 괜찮을 것 같다. 포장 아직 그대로니까. 내용물은 절대로 깨끗하다. 모든 바닥에 떨어진 음식은 5초 안에 주워 먹으면 괜찮다. 포장을 뜯지 않은 음식은 그 시간제한이 특별히 무기한으로 늘어난다. 초등학교 때 동네 형에게 이 중요한 공식을 들었다. 나는 아직도 그 형에게 감사하다. 덕분에 인생을 살면서 많은 음식들을 건졌다. 마트 입구를 들어섰을 때만 해도 괴인 때문에 푸딩을 못 먹게 된 줄 알고 발끈했는데, 공짜 푸딩을 얻게 되어 나는 도로 기분이 좋아졌다. 


 "아저씨. 푸딩 훔쳤어."

 "...?"


 뒤를 돌아보자 어떤 양 갈래 머리를 한 꼬맹이가 나를 향해 삿대질을 하고 서 있었다. 아이는 괴인을 보고 도망치지 못한 채 혼자 쇼핑카트 뒤에 숨어있었던 것 같다. 나는 나 스스로 구구절절한 자기합리화의 과정을 거쳤는데도 불구하고 아이의 지적에 왠지 뜨끔해서 몸을 떨며 놀랐다. 


 "훔친 게 아냐! 괴인 처치의 사례 개념이다."

 "훔쳤어."

 “안 훔쳤다.”

 “훔쳤어.”

 “...”

 “...”

 "...너도 먹을래?"


 내가 푸딩을 내밀자 아이는 밝게 웃으면서 끄덕였다. 실은 우리의 마음은 같았던 것이다. 우리는 마주보고 흐뭇하게 웃었다. 아이는 쭐레쭐레 내게로 오더니 초콜릿! 하고 외쳤다. 나는 비닐봉투 안을 뒤져서 푸딩을 내 주었다. 아이가 푸딩을 배에 문질러서 닦더니 헤죽 웃었다. 왠지 귀여워서 볼을 가볍게 꼬집어주었다. 내 손에는 괴인의 피가 묻어있었기 때문에, 아이의 볼에는 인디언 꼬마처럼 붉은 혈흔자국이 남았다.


 “아저씨 엄청 강하네.”

 “응.”

 “아까 A급 히어로 다녀갔는데, 이 괴인 처리 못 했거든.”

 “어떤 히어로?”

 “검은 옷을 입고 있었어.”


 이 일대에서 검은 옷을 입고 있는 히어로라면 후부키 그룹이다. 나는 후부키 그룹의 일감을 뺏은 셈이 되었다. 하지만 뭐, 그들도 해치우지 못한 건이라니. 오히려 내가 해결사가 된 상황이다. 괜찮겠지.


 “아까까지만 해도 검은 옷 입은 예쁜 언니 있었어.”

 “후부키인가 본데.”

 “어, 맞아. 그럴거야.”

 “후부키, 왜 괴인 안 죽이고 그냥 돌아갔어?”


 꼬마아이는 약간 겁에 질린 표정이 되었다. 그리고 떠듬떠듬 자기가 본 것을 이야기해주었다. 푸딩은 소중하게 안고 있는 채였다.


 “후부키라는 언니, 배 좀 뚫렸어.”

 “뭐?”

 “피 많이 났어.”


 지옥의 후부키. 그래도 어지간한 괴인은 처리할 정도론 강하다고 생각했는데. 고전했는가보다. 나는 모든 괴인을 원 펀치에 끝내버리므로, 괴인의 체급을 가늠하지 못한다. 그래서 방금 해치운 녀석이 용급인지 귀급 뭐시기인지 영 알 수가 없다.


 “많이 다쳤어?”

 “응. 괴인보다 피 많이 났어.”

 “아...”


 가장 최근에 본 후부키는 지난번에 연말 파티에 왔을 때였다. 후부키는 술에 많이 취해서 꼴이 좋지 않았다. 후부키는 가라오케라도 온 듯이 본인 애창곡을 흥얼거렸다. 그리고 탬버린 치듯이 프리즈너의 가슴근육 마구 때렸다. 찹찹거리는 소리 났으므로 재미있었다. 후부키는 술에만 취하면 좀 이상해지는 것 같다. 심리적으로 억눌려 살아온 사람들이 술에 취하면 유독 망가지는 경향이 있다는 다큐를 언젠가 본 적이 있다. 기 센 언니를 뒀으니 그럴 만도 한가. 내 청바지에 대고 망설임 없이 토하는 걸 보니 반년간의 후부키와 나는 꽤 친했나 보다.


 당시 후부키가 그 꼴이 났는데도 s급 히어로들 다들 웃기만 했고. 익숙하다는 듯이 무시했다. 우리의 술자리에선 이런 일이 자주 있었나보다. 그렇다면 우린 엄청 친한 것이다. 나랑 그렇게 친한 여자가 많이 다쳤다니까 마음이 영 좋지 않았다. 아니 좋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신경이 쓰인다. 그런 천진난만한 여자가 죽으면 불쌍하다.


 “죽었어?”

 “내가 숨어서 휴대폰으로 구급차 불렀어.”

 “죽진 않았다고?”

 “안 죽었어.”

 “병원에 있겠네.”

 “응.”


 나는 푸딩을 챙겨들고 근처 응급실에 들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 청바지에 토할 정도로 친한 친구를 위해서라면 병원에 기꺼이 들러 줄 수 있다. 딱히 한가해서 그런 건 아니다. 실제로 한가하긴 하지만 이번에는 정말 후부키가 걱정이 되어서 가 주려는 것이다.


 푸딩을 잔뜩 만졌더니 손이 꽤 끈적거리길래 병원에 들어가기 전에 손을 씻었다. 손을 털며 응급실 근처를 어슬렁거렸다. 로비의 간호사 이야기를 들어보니 후부키는 응급처치 중이라는 것 같았다. 다행히 죽지는 않았다고 한다. 사이타마라고 이름을 댔더니 보호자 자격이 단번에 생겼다. 


 딱히 할 일도 없고 나랑 친하다는 여자가 죽을 위기에 있다니 걱정도 되고 해서, 후부키가 수술하는 동안 보호자 의자에 앉아서 물티슈로 푸딩의 표면을 닦았다. 끈적거리는 푸딩 수십 개의 표면을 하염없이 닦고 있노라니 시간이 금방 갔다. 곧 검은 옷의 후부키 그룹 멤버들이 울면서 병원으로 왔다. 막 오열하면서 여기저기 전화하며 펄쩍펄쩍 뛰기에 분위기상 그들에게 말은 걸지 않았다. 그냥 숙연하게 푸딩 닦고 앉아있었다. 침묵이 오래가니 왠지 도 닦는 기분이 됐다. 도자기 장인이 된 것과 같은 평화와 정적이었다. 내 옆으론 사용한 물티슈가 산처럼 쌓였다.


 “사이타마 씨.”

 “네.”

 “후부키씨 보호자 되십니까?”

 “그냥 아는 사람인데요.”

 

 내가 가장 먼저 접수를 해서 내 이름으로 부르는 것 같다. 실은 접수 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그냥 내 이름 물어보더니 간호사가 멋대로 접수했다. 푸딩도 다 닦았고 해서 후부키를 보러 들어가기로 했다. 얼마나 괜찮은지 정도 확인하고, 되도록이면 살아있으라고 격려한 뒤에 다시 집에 돌아갈 계획이다. 고로케도 사고 고양이용 캔 참치도 살 계획이었는데 괴인 때문에 푸딩만 잔뜩 얻고 돌아가게 생겼다.


 “야!”


 누군가 찢어지는 목소리로 뒤에서 날 불렀다. 나는 힐끔 뒤돌아봤다. 타츠마키였다. 타츠마키는 얼굴에 눈물자국이 번들번들 말라 있었다. 본인은 나름 지금 씩씩한 척 하고 있지만 이곳에 오기 전 자기도 모르게 울었을 게 분명하다. 


 “불쾌해. 너가 왜 후부키 보호자야?”

 “나도 몰라.”

 “모르긴 왜 몰라!”

 “그냥 그렇게 됐어.”


 나는 타츠마키가 약간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뿐인 동생을 죽어라고 아끼는 꼬맹이다. 저승에 동생을 빼앗길 뻔 했다니 안 됐다. 만일 내게 히어로 동생이 있는데, 그가 괴인에게 배가 뚫려 죽는다면 매우 슬플 것이다. 


 “...”

 “...”

 “네가 후부키를 살려 준 거야?”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표정뿐만 아니라 실제로 내면도 매우 어리둥절했다.


 “괴인은 어떻게 됐어?”

 “죽였어.”

 “...후부키를 구했구나.”

 “일이 그렇게 되냐.”

 “그리고 그 푸딩들은 다 뭐야?”

 “...?”


 혼자 다 먹으려고 했다고 하면 저 여자의 성격 상 내 뺨을 올려붙이고도 남겠다 싶어서 대충 둘러댔다. 


 “병문안 선물인데.”

 “...초콜릿 맛이네.”

 “초콜릿 푸딩 싫어해?”

 “...내 동생이, 어렸을 때부터...”

 “...”

 “푸딩 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거야...”


 왠지 흐름 상 나는 왠지 엄청 착한 놈이 되어있었다. 나는 후부키의 취향 조사해서 푸딩 사오지 않았다. 그냥 후부키 죽으면 불쌍하니까 확인하러 온 것이다. 푸딩은 내가 먹으려던 거였다. 왠지 묘하게 죄책감 들기 시작해서 전력으로 부정했다.


 “그냥 우연인데.”

 “너 주제에, 감히 나보다 먼저 후부키를 구해?”


 타츠마키는 나를 칭찬하는 것 같다. 워낙 못돼빠진데다 입까지 험한 꼬맹이라 제대로 된 칭찬은 하지 못하는 것 같지만. 


 “슬퍼하지 마. 네 동생 안 죽었어.”

 “아무튼 고맙다.”


 타츠마키가 살면서 고맙다는 말을 한 것은 내가 그녀 인생 최초이리라. 거의 역사적일 것이다. 나는 엉겁결에 후부키 구하고, 후부키 몫의 복수까지 한 뒤에, 병원 응급실 접수를 한 뒤 병문안 선물로 푸딩을 잔뜩 사온 위인이 되었다. 나는 그런 적 없지만 어쩌다보니 상황이 그렇게 됐다. 기가 막힌다.


 “...”

 “...”


 타츠마키는 주변의 후부키 그룹의 멤버들이 울고불고 난리인 그 난장판을 재빠르게 정리했다. 어떻게 정리했느냐면, 그냥 모든 멤버를 공중으로 띄워서 밖으로 보냈다. 소란스럽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역시 그녀는 못된 꼬맹이다. 그러더니 정말 믿을 수 없게도 공중에서 천천히 떠서 이동해 내게로 왔다. 또 토닥토닥 나를 안아주었다. 나는 약간 굳어버렸다.


 “주제 넘게 동생을 살려주다니.”

 “아, 아니... 다 우연이고.”


 그녀에게 칭찬을 듣는 건 처음이다. 조소처럼 들릴 정도로 못된 말투지만 그녀로썬 나름의 칭찬일 것이다. 지금의 타츠마키의 태도는 평소와 너무나 다른 태도라 이 여자가 얼마나 본인 동생을 소중히 여기는지를 알 수 있게 됐다. 평소에 나를 엄청 싫어하던 여잔데, 동생 목숨을 살려줬다는 이유로 가볍게 토닥토닥 안아주는 걸 보면... 동생을 대체 얼마나 아끼는 걸까. 행복해라, 너희들. 


 타츠마키는 폴폴 날아서 후부키를 이런 싸구려 병원에 입원시킬 수는 없다며 그대로 후부키를 안아 들고 날아가 버렸다. 이제 겨우 수술 마무리 하려는 참인데, 그냥 초능력으로 병실 일부분 뜯어서 허공에 띄우더니 가 버렸다. 불행히도 영문 모르는 의사 한 명 딸려가는 것 같았다. 하늘을 나는 경험 처음이면 좀 무서울 텐데.


 건물의 일부가 뜯어진 병원은 황망했다. 수술실 하나가 통째로 없어져서 건물의 철근 사이로 바깥이 다 보였다. 새 떼가 조금 날아가는 배경으로, 나는 구멍 뚫린 싸구려 병원에 서 있었다. 의료기구들은 박살나서 현대미술처럼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가히 SF물 마니아들이 좋아할만한 장면이었다. 뒤를 돌아보자 꽤 익숙한 형상이 눈에 들어왔다. 이런 기묘한 풍경에 어울릴만한 인물이었다. 나와 함께 사는 사이보그였다.


 “이쪽에서 귀급 괴인이 출현했다기에.”

 “...”

 “피해상황을 가늠하러 한번 와봤습니다만...”

 “...”

 “아까는, 뭐 하셨던 겁니까?”


 제노스의 대사는 전형적이었다. 이제 막 영화감독의 꿈을 키우기 시작하는 영화학도의 첫 로맨틱 코미디 처녀작의 연출도 이렇게까지 엉성하고 구리지는 않을 것 같다. 제노스는 꽤 오랫동안 저 곳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나보다. 그러니까 아까의 껴안는 모습 제노스에게 들켰다. 제기랄. 타츠마키에게 해명시키고 싶지만 제노스에게 상냥하게 해명해줄 성격도 아닐뿐더러 지금 이 자리에 없다.


 “좀 포옹했는데.”

 “그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내가 이 여자 동생 구한 꼴이 됐으니까.”

 “선생님이. 후부키를 구했습니까?”


 제노스는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사귀지도 않는 사람과 껴안는 상황 들켜 버리고 원래의 연인이 오해한다. 닳고 닳은 클리셰다. 차라리 진짜로 바람피우고 키스를 하다가 들켰으면 덜 억울했을 텐데. 키스도 아니고 단순 포옹인데도 제노스는 약간 불쾌해 보였다.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냐.”

 “선생님이 다른 히어로를 적극적으로 구했다니 이상합니다.”

 “아니, 나랑 후부키 친한 것 같던데.”

 “선생님은 지난 반년이 기억에 없으신 분입니다.”

 “에엑...”

 “구한 것 까진 그렇다 치더라도, 당신은 후부키의 병문안까지 오실 분이 아닙니다.”

 “아, 아니 어쩌다 보니...”

 “에스퍼 자매를 예상보다 소중하게 생각하시는군요.”


 역시 제노스는 영리했다. 따박따박 반박하는 말마다 죄다 맞는 말처럼 들렸다. 내가 에스퍼 자매를 소중하게 생각한다는 건 틀렸다. 별로 관심 없다. 하지만 나 본인조차도 설득될 정도로 제노스는 구구절절 잘도 말했다. 뭐냐 이 놈. 틀린 말을 엄청 맞는 말처럼 하는 재주가 있다. 개소린데 듣고있자니 굉장히 논리정연하다. 목소리 톤도 차갑고 정갈하고. 정황도 모두 들어맞고. 변명하려는 시도를 할수록 내가 치졸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점점 죄인이 되어갔다. 


 뭐지. 나는 단지 푸딩 먹으려고 좀 외출했을 뿐인데. 고로케도 먹고 푸딩도 먹고 피자빵도 먹고 즐거운 하루 보내려고 했는데. 일이 영 이상하게 돌아간다. 


 갑자기 모든 게 귀찮아져서 반박할 의욕도 없게 됐다. 그냥 제노스의 장황한 잔소리를 들으며 멍하니 서 있었다. 제노스의 잔소리는 엄청 길었다. 나는 대부분 새겨듣지 않았다. 한쪽 귀로 술술 들어온 뒤에 한쪽 귀로 자연스럽게 빠져나가는 그런 통과 수준의 감각이었다. 


 그 기나긴 잔소리를 듣고 있자니 나의 영혼이 투명도 10% 가량의 형상으로 내 육신을 벗어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왠지 학창시절의 추억이 떠올랐다. 수업시간이 지루하다고 대놓고 엎드려 자면 혼나니까, 수업시간엔 주로 영혼과 육체를 분리한 상태로 그냥 눈 뜨고 책상에 앉아있었다. 몸은 교실에 앉아있지만 영혼은 우주공간 어딘가를 떠돌며 유유자적 놀 수 있는 스킬이다. 누구나 10여년을 학교에 다니면 그 놀라운 기술을 터득할 수 있다. 신비롭게도 우리 반 아이들 대부분이 그랬다. 모두가 영혼분리의 기술, 즉 도를 깨우친 것이다. 그 기술을 간파한 교활한 담임은 우주공간을 떠도는 학생을 찾아내서 교과서 어딘가를 읽어보라고 기습 질문을 하곤 했다. 그러면 급작스럽게 지구로 복귀한 해당 학생은 몸을 떨며 놀랐다.


 잔소리는 무척 길었다. 지금 제노스의 말을 누군가 받아 적어서 책으로 묶은 뒤에 출판한다면 전화번호부 정도는 될 것이다. 아마 폰트 크기도 최대한 작게 만들어야 할 것이다. 멋모르고 폰트를 크게 설정해서 인쇄하면 아마 2권 분량 생겨날 것이다. 나는 영혼분리의 기술로 넋을 빼고 있던 와중에 갑자기 손에 들려있는 푸딩이 생각나서 문득 말했다.


 “제노스, 뭐가 됐던 미안해. 푸딩 먹을래?”

 “...”

 “...”

 “...”

 “왜 사과하십니까. 역시 바람피우셨습니까?”

 “아, 아니라고!”

 “방금 미안하다고 인정하셨습니다.”

 “아니, 어쩌다보니 우연히 그렇게 됐다니까?”

 “반년 전의 선생님은 여자 좋아하셨으리라 예상은 했습니다.”

 “남자보단 여자 좋아하긴 하지만.”

 “...”


 제노스는 한동안 침묵했다. 나 왠지 말실수 해버린 것 같다. 영혼분리의 기술의 유일한 단점은 이것이다. 제정신으로 복귀해서 어리바리 하는 동안 상대방이 열받아한다.


 “약속 노트의 4번, 7번, 8번 조항 한꺼번에 어기신 것입니다.”

 “아...좀... 일이 귀찮게 됐네.”


 나는 기가 막혀서 약간 웃었다. 사실 지금의 나는 약속 노트 내용 기억 안 난다. 들을 당시 9번이 엄청 웃겨서 9번만 기억에 남아있는 정도다. 제노스는 그거 10가지 모두 외웠다니 대단하다. 


 “그래서 뭐 어쩔건데?”

 “패널티 받으셔야지요.”

 “뭐? 나한테 패널티를 줘? 엄청 막 나가네 너.”

 “약속 지키십시오. 정말 머리 폭발해버릴 것 같습니다.”


 제노스는 눈에 띄게 화가 난 얼굴이 되었다. 이전 같으면 상상도 못했을 그런 태도다. 감히 내게 화를 내다니. 아, 아니 내가 제노스를 낮잡아보고 무시한다기 보단 평소에 제노스가 워낙 나를 하늘같은 스승으로 모셨기 때문이다. 이제 연인이다 이거냐. 이정도 대들어도 내가 이해할 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굴어서 당황했다. 이 상황 자체가 그동안 제노스가 내게 제대로 사랑받고 있었다는 증거 같아서 오싹오싹했다.


 “패널티 뭔데.”

 “하루정도 시간 비워서 그날은 제가 하자는 대로 합니다.”

 “내가 왜 그래야 돼. 나 화낸다?”

 “저도 화났습니다.”


 나는 약간 움찔 할 정도로 놀랐다. 순간 제노스의 뒤로 정말 귀신의 잔상이 보인 것 같다. 지금은 깨끗이 사라지고 없지만, 분명 도깨비 홀로그램 언듯 보였다. 사실 나는 마음만 먹으면 제노스 다른 도시로 날려버릴 수도 있지만, 방금만큼은 뭔가 본능적으로 쫄아서 움찔했다. 제노스 정말 화났다. 좀 충격적일 정도다. 


 제노스가 나와 사귀게 된 이후 아무리 감정표현에 능숙하게 바뀌었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화 내는 건 처음 본다. 만약에 제노스가 영화 속의 캐릭터라면, 감독에게 이 자식 성격 1편과 2편이 많이 다르다고 항의했을 것 같다. 


 “이상한 짓 할 거면 절대 안 들어줘.”

 “선생님. 제가 그렇게 싫으십니까.”

 “나를 너무 괴롭히면 싫어질지도.”


 제노스는 낯빛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방금 내가 한 말은 제대로 먹힌 것 같다. 놈에게 유효한 타격을 먹이는 발언의 기준이 뭔지 모르겠다.


 “제 단점은 너무 감정적이라는 것입니다.”

 “알면서 왜 그랬어.”

 “감히, 제 정신을 잃고 대들었던 것 같습니다. 저 자신도 스스로 한 짓이 믿기지 않습니다.”

 “나도 너가 한 짓 안 믿겨...”

 “한동안 집에 들어가지 않고 반성하겠습니다.”


 미안한 나머지 한마디 해보는 말이겠거니 싶었는데, 제노스는 정말 그날 저녁 저녁밥 먹으러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그게 오늘 저녁만 그러려니 넘겨짚었다. 한동안의 기준이 뭔지 모르겠다. 한동안이라면 하루 정도일까. 하지만 다음날도, 그 이튿날도, 그 이튿날 저녁에도 제노스는 집에 오지 않았다.  




 

-





 제노스가 돌아오지 않았으므로 나는 혼자 잤다. 이불을 한 채만 깔고 잤다. 그리고 느지막한 아침에 일어나서 이불을 갰다. 제노스가 속죄하겠답시고 밤새 현관문 밖에 우두커니 서 있었을까봐 현관문을 열어 확인해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문밖을 확인한 뒤 나는 언제나처럼 다육식물에게 물을 주고, 양치를 하고, TV를 봤다. 뉴스에선 후부키의 생존 소식이 전해지고 있었다. 다행이었다. 지난 연말 파티 즐거웠는데 다음 파티에도 다들 와 줬으면 좋겠다. 당시는 내가 기억을 잃은 탓으로, 진심으로 어울릴 수 없었다. 내내 어리둥절했었다. 나는 저 녀석들을 이번 연말에 다시 초대할 것이다. 그 때의 우리는 진짜로 친해져 있을 것이다. 그랬으면 좋겠다.





-





 제노스는 다음 날도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혼자 산책을 하다가 길거리에서 에너지 바를 받았다. 견과류와 크랜베리가 섞인 스틱 형태의 과자였다. 꽤 맛있었다. 새로 생긴 서점이 판촉물로 나눠주는 것이었다. 요즘 서점은 책갈피같이 시시한 물건 나누어주지 않는구나. 에너지 바 같이 괜찮은 걸 나눠주다니, 첫인상이 좋은 서점이다. 만화잡지 사러 종종 가야지. 만일 지금 이 자리에 제노스가 있었다면 제노스 몫까지 에너지 바를 두 개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제노스는 내게 에너지 바를 주면서, 이런 것 좋아하시나요. 한 박스 사 놓을까요. 하고 물어 올 것이다.





-





 제노스가 돌아온 것은 무려 일주일 뒤였다. 게다가 몸은 30% 정도가 날아가 있는 상태였다. 굳이 설명하자면 한쪽 팔은 아예 없었고, 흉부 하나가 날아가 있었다. 상의는 불타버렸는지 입고 있지 않았다. 


 나는 돈까스 덮밥을 먹고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온몸에서 푸른 전류를 흘리며 현관에 서 있는 제노스를 멍한 표정으로 보았다. 제노스 몫의 식사는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영 곤란했다. 제자는 사람이었다면 죽었을 지경으로 다쳐있는데 나는 입 안에 음식 가득하게 씹고 있으려니 좀 민망했다. 어제 장을 볼 때, 제노스 언제 돌아올지 모르겠어서 돼지고기 등심 한 덩어리만 샀다. 그러니까 돌아오지 않은 제노스의 탓이지 내 탓은 아니다. 


 "늦었네."

 "네."


 제노스는 본인이 늦었다는 것 정도는 자각하고 있는 것 같다. 연락 한 번 없이 이렇게 오랫동안 가출한 건 처음이다. 그동안 협회 일이 아무리 바빠도 무조건 연락은 하던 녀석인데.


 "뭐 하느라 늦었어?"

 "자살하려 했지만 잘 안됐습니다."


 제노스의 대답과 동시에 나는 밥알이 목에 걸려서 밭은기침을 했다. 저 미친 놈.


 "생명은 소중한 거야."

 "모르겠습니다. 일주일 전엔 죽고 싶었습니다."

 "아니, 죽을 정도의 죄 지은 적 없잖아."

 "감히 선생님께 화내다니. 죽어도 쌉니다."


 본인이 멋대로 오해하고 대들었던 게 얼마나 잘못된 거였는지 정도는 알고 있는 것 같다. 그거 오해라니까... 한마디 트고 나자 나는 갑자기 다 귀찮아서 그냥 변명 포기하고 다시 밥알 입안에 밀어 넣기 시작했다. 아무리 내 사연이라지만 사연 너무 길다. 그리고 우연 요소가 너무 많아서 말해봤자 제노스가 믿어 줄 것 같지도 않다.


 "그래도 죽을 정도의 죄는 아니잖냐."

 "글쎄요. 그냥 혼자 생각하다보니, 저는 이제 연인도 가족도 없으니 그냥 죽는 게 낫지 않을까 싶어서요. "

 "우리 사귀잖아."

 "명분 뿐이잖습니까."


 사귀어 주는 건 명분 뿐이라는 내 마음속 비밀 중의 비밀을 어떻게 읽은 걸까. 맛있게 먹던 덮밥이 차갑게 식은 것처럼 느껴졌다. 오늘 양파소스 제대로 잘 되어서, 기분 좋게 먹고 있었는데... 


 "가족의 원수를 갚기 전이라, 죽는 것 수치스럽지만...“ 

 “...”

 “크세노 박사님께도 정말 죄송하고 수치스럽지만...”

 “...”

 “그런 수치를 이길 정도로 죽고 싶은 충동 들었기 때문에 괴인 소굴에 죽으러 갔습니다."

 "너 전원 딸깍 끈다던지 그런 자살 못해?"

 "저는 히어로니까, 싸우다 죽는 편이 세상에 이롭습니다."


 왠지 제노스가 생각해낸 자살 방법이 장렬하다. 녀석답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단무지를 입에 넣고 오독오독 씹었다. 


 "그래서 어땠어?"

 "싸우던 도중 깨달았는데 저는 파츠 바꾼 뒤 강해졌습니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약간 헛웃음을 지었다.


 "일주일간 괴인 많이 소탕했습니다."

 "수고했네."

 "히어로 순위 올랐습니다."

 "원래 죽을 각오로 싸우면 더 잘되는 거야."

 "그렇군요."

 "그래서 얼마나 올랐어?"

 "선생님이 내 주신 과제, 곧 달성합니다."


 과제라 하면. S급 몇 위 안에 들라고 말한 과제 같다. 히어로 순위는 성과 달성식이라 엎치락뒤치락하는 일 잦다. 그나저나 내가 몇 위 안에 들라고 했었더라? 그 부분은 숫자라서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되물어보면 왠지 스승답지 못하니까 그냥 입 다물고 밥을 마저 먹었다. 나중에 최신버전 히어로 장부 힐끗 확인해 보면 된다. 


 "언제나 죽을 각오로 싸웠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겁니다." 

 "맞아. 방심 좀 그만해."

 "..."

 "..."


 잠시 정적이 흘렀다. 정적이 흐르는 동안, 방이 워낙 조용해선지 밖에 비행기 지나가는 소리도 들렸다. 비행기 소리를 들을 때마다 세상 사람들은 참 다람쥐같이 돈을 모아 부지런히 해외여행을 다니고 있구나 싶다. 해외에 놀러가선 도토리 모으듯 기념품도 긁어모아 올 것이다. 그들의 시끌벅적한 활력과 의욕을 본받고 싶다. 


 "...진심으로 죽을 각오 했더니 승리의 이미지가 보였습니다."

 "그렇지. 하지만 때론 승리의 이미지가 전혀 없을 때도 내야 하는 것이 용기다."

 "좋은 말입니다."


 제노스는 금빛 안광을 반짝이며 기뻐했다. 메모할 팔이 있었다면 메모했을 기세였다. 사귀고 나서도 꾸준히 제노스는 나 존경했구나. 가끔 남자친구 행세를 하며 괘씸하게 구는 게 추가됐을 뿐이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자살하려 했다던 녀석의 표정이 다시 해맑아 보여서 영 웃겼다. 


 "강하다는 건 시시하지."

 "선생님은 절대 시시하지 않습니다."

 "맘대로 생각해..."

 “안 그래도 앞으로는 맘대로 생각할 계획입니다. 가출 7일째 되는 날에 깨달았습니다. 앞으로 설령 선생님과 아무런 관계가 아니게 되더라도... 선생님과 함께 있으면 그걸로 좋지 않은가,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더 이상 저를 좋아하지 않는 당신과 같이 사는 것은 끔찍하고 괴롭습니다. 하지만 그 괴로움을 참아낼 수 있을 정도로 저는 당신을 좋아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끈질기게 계속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제노스가 조곤조곤 집필하는 멜로 라디오를 듣고 있자니 어느 새 점심밥 그릇은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물론 이번에도 제대로 귀담아 듣지는 않았다. 돈까스가 맛있었기 때문이다.


 "당신을 좋아합니다. 어떻게든 살아보이겠습니다."

 "배부르다..."

 "패널티, 내일 드리겠습니다. 하루 일정 비워두세요."


 제노스는 통보하더니 파츠를 갈아 끼우러 사라졌다. 나는 배부르기도 하고 제노스가 통보한 것 어이없기도 하고 약간 멍했다. 내일 한가하니까 괜찮겠지 싶었다. 


 실은 같이 살던 제노스가 자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후부키도 걱정되지만 제노스 쪽이 더 걱정된다. 마음 영 불편하다. 같이 살면서 매일 얼굴 보던 놈인데. 좋아하는 것 까지는 아니지만,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 항상 날 모시던 남자애가 먼저 저승에 가버리면 찝찝하다. 그 녀석과 함께 쓰던 모든 물건들이 유품이 된다. 그리고 카레를 엎기 전까지만 해도 꽤 좋은 녀석이었다. 


 제노스의 몸에는 맞서싸운 괴인의 크기가 가늠 될 정도의 상처가 있었다. 자기도 모르게 순위 오를 정도로 싸웠다니 좀 많이 안쓰러웠다. 그나저나 제노스는 삽질을 할수록 본인 커리어에 이득이 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서 신기하다. 지난번에 방송으로 프러포즈한 사건도 그랬다. 나에게 자기 마음을 전한다는 개인적인 목적은 대실패했는데 커리어는 올랐다. 본인은 방송국 부수고 싶어 하며 침통해했으나 결과적으론 인지도가 올랐다. 잘 됐지 않은가. 앞으로도 계속 삽질하면 본의 아니게 고속승진 할 것 같다. 애초에 승진을 목적으로 마음먹고 노력하면 이 정도의 성과는 못 낼 것이다. 생각할수록 웃기다.


 사실 최근에 혼자 밥 먹으려니 쓸쓸했다. 뭐랄까, 불러도 대답 아무도 없고... 다시 1인 자취생활 되어 버렸고... 인정하긴 싫지만 나도 모르게 제노스와의 생활이 익숙해졌다. 제노스 돌아오니 귀찮지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선생님. 오늘은 당신의 패널티로 데이트 갑니다."

 "우리 데이트 보통 어떻게 했는데?" 

 "그냥 같이 있기만 해도 좋았습니다."

 "중학생이냐."


 엎드려서 괴인이 나온 신문을 읽던 나는 제노스의 제안에 속으로 내심 안도했다. 바지 벗고 개처럼 엎드리라는 요구 해오면 어쩌나 걱정 많이 했다. 희롱당할 위기가 오면 나도 모르게 주먹으로 제노스 쾅 쳐서 날려버릴지도 모른다. 나 때문에 한번 죽으려고 했던 제노스, 또 죽이고 싶지 않다. 아니 죽이고 싶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절대 안 그랬으면 좋겠다.


 제노스가 없는 생활은 생각보다 많이 외로웠다. 내게 외롭다는 감각이 생긴 게 이상스럽지만 진짜로 일주일간은 좀 외로웠다. 싱숭생숭했다. 비유하자면 키우던 강아지가 가출이라도 한 느낌이었다. 제노스가 진짜 개였다면 나는 전단지라도 붙였을 것이다. [개를 찾습니다. 이름은 제노스입니다. 복슬복슬한 금빛 털에 금빛 눈동자, 잘생긴 얼굴 가졌습니다. 제노스, 집에 와도 화 안 내니까 돌아오렴.] 이런 멘트 A4용지에 인쇄해서 동네에 붙이고 싶었다. 많이는 아니고 한 10장 내외 정도는 붙일 의향이 있다. 지금의 상황은 강아지가 주인과 다투고 상심한 나머지 자살하려고 자기보다 큰 동네 개들 물고 다닌 셈이다. 참, 마음이 안 좋다. 말 잘 듣던 착한 강아진데. 주인 된 입장으로써 그렇게나 상심시켰다니 미안하고 안 됐다. 단지 에스퍼 자매 관심 없는 나를 자기 멋대로 오해한 건 짜증난다.


 "점심 아직이지요. 먹고 싶은 메뉴 있으신가요." 

 "라면 먹을까."

 "그러죠."


 나는 크림색 스웨터를 챙겨 입었다. 제노스는 사이보그라 춥지도 않을텐데 따뜻하게 입었다. 남들 보기에 추울까봐 그러는 걸까. 


 우리는 그냥 별 거 아닌 얘기를 하면서 걸었다. 나는 초콜릿 푸딩 이야기를 해 주었다. 우연히 공짜 푸딩을 많이 얻게 되었는데, 먹다보니 너무 달아서 반도 채 못 먹었다는 이야기다. 별 거 아닌 이야긴데도 제노스는 피식피식 웃었다. 


 “냉장고에 가득한 봉투의 정체가 모두 푸딩이었습니까.”

 "인간이란 아무리 맛있는 게 있어도 많이는 못 먹는 존재인가 봐."

 "그렇죠. 그래서 과거 로마 귀족들은 음식을 씹기만 하고 뱉었다고 합니다."

 "그런 방법이."


 제노스는 잡지식을 알려주었다. 로마 인간들 재수없다. 나는 만일 부자더라도 기분 나빠서 먹다 도로 뱉는 짓 못할 것 같다. 음식 버리는 기분 아깝고 불쾌해서 일부러 토하는 짓 못한다. 혹자는 거지 근성이라고 할 지 모르겠지만, 음식은 최대한 다양한 방법으로 남기지 말고 먹어야 한다. 음식은 소중한 것이다.


 "집에 가면 너도 푸딩 줄게."

 "감사합니다."

 "라면 집 다 왔네."


 가게에 공석이 많기에 우리는 넓은 자리에 마주보고 앉았다. 나는 기본 라면에 차슈를 추가해서 주문했다. 제노스도 나와 같은 걸 시켰다. 


 메뉴판을 살펴보니 메뉴판에는 우동도 있었다. 나는 이 가게에 우동도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고 흠칫 놀랐다. 전에 들은 제노스의 말로는, 우동을 먹고 돌아오는 길에 고백했다고 했다. 아마 그 가게는 높은 확률로 이 가게일 것이다. 이 근처에서는 여기가 가장 단골인데다, 우리는 우동은 여기서만 먹었다. 제노스가 또 추억 상자 커팅해서 추억 무더기 주섬주섬 꺼낼까봐 나는 최대한 침착하게 먼 산을 보면서 음식을 기다렸다.


 "여기서 우동 먹고 나서 고백했는데 말이죠." 


 아니나 다를까 이곳이 맞다.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현실이 된다. 물어보지도 않은 추억 이야기를 구구절절 꺼낼까봐 애써 먼 산을 보고 있었는데, 굳이 말해주는 제노스는 참 어지간히도 친절하다.


 "그딴 거 말 안 해줘도 돼."

 "짝사랑이 오래가자 저는 정신적인 한계에 부딪혔던 것 같습니다."

 "안 궁금하다니까..."

 "거절당하나 싶었는데, 선생님께서 저를 먼저 좋아해왔다고 대답하셨습니다..."


 나는 과거의 내가 한 짓이 쪽팔린 나머지 식당 벽과 테이블을 박살내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과거의 내 자신이 싫다. 하지만 내가 나고 내가 나다. 스스로가 치욕스러워서 내 얼굴에는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제노스는 계속 이어서 말했다.


 "제가 그때 얼마나 긴장했느냐면,“

 “...”

 “아직도 당시 주변에 있던 차 번호판 숫자를 기억할 정도입니다.“

 “...”

 “52-94, 80-67입니다.”

 “...”

 “기억엔 없으시겠지만, 그 때 제 마음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그거 나 인기있구나, 하는 기쁜 마음에 충동적으로 나도 널 좋아한다고 맞받아친 걸 수도 있다고. 또는 고백상대에 대한 립 서비스 매너였을 수도 있다. 어른의 사회생활이란 그런 거야. 명심해라."


 애써 수습하는 나를 보며 제노스는 쿡쿡 웃었다. 저 녀석의 웃는 모습 이제는 익숙해지려 하는 내 자신이 싫다. 제노스의 웃는 모습 보고 처음에는 기겁했었는데 말이다. 저 연인느낌 과시하는 여유로움이 익숙해져선 안 된다. 적당히 어울려주다가 헤어지고 싶다.


 "먼저 좋아했을 리 없는데..."

 "당시 서로 확실히 진심이었습니다. 이번에는 상처 안 받습니다.“ 

 “고백해줘서 고마우니까 립 서비스로 받아친 거 아니었을까.”

 “음식 나왔네요. 드시죠."


 타이밍 좋게 음식이 나왔다. 나는 젓가락을 테이블에 콩콩 부딪혀 젓가락의 키를 맞추면서, 제노스를 노려보았다. 제노스는 천연덕스럽게 냅킨을 내 수저 놓는 자리에 깔아주는 중이다. 나는 면을 집어 들어 입에 넣었다. 


 이 집 라면은 여전히 맛있었다. 겨울이라 더 맛있는 것 같다. 허기지고 있던 터라 나의 라면은 빠르게 줄어들었다. 노란 면발이 쫄깃쫄깃 맛있다. 제노스도 슬슬 먹기 시작했다. 호르륵 호르륵 소리가 이어졌다. 이 가게는 맛있지만 간이 약간 짠 편이다. 그래서 국물은 많이 마시지 않는다. 가게 안에 사람이 별로 없어서 우리가 먹는 소리가 매장 안에 유독 크게 들렸다. 주방장은 부엌에 작게 마련된 TV에서 나오는 연속극에 한눈을 팔고 있다. 부엌에서 라면 육수의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풍경이 정겹다. 나는 크게 면발을 한 입을 문 뒤에 우물거리며 제노스에게 말했다.


 “가까운 사람이 고백해오면 보통 당황하잖아.”

 “그렇죠.”

 “난 당황한 나머지 엉겁결에 맞받아쳐버린 거지.”

 “아니오. 제대로 진심이셨습니다.”

 “진심이라는 증거 있냐."

 "대답 마치자마자 키스하셨으니까요."


 나는 입에 힘이 빠져서 먹고 있던 면발을 다시 그릇으로 후두둑 쏟아버렸다. 로마 귀족처럼.











-



|
 Prev   1   2   3   4   5   6   7   8   ···   11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