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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노사이] 카레를 엎은 날 1 
작성일시 : 2016. 1. 5. 18:37 | 분류 : 장편





 상황이 좋지 않다. 아니 좋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이제 영영 되돌릴 수 없다. 부엌 입구에 참혹하게 엎어진 카레를 보고 있으려니 지금껏 저질러온 비슷한 인생의 실수들이 주마등처럼 겹쳐 지나간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내 인생의 마지막 엎은 카레라고, 더 이상의 엎은 카레는 없을 것이라고 깊은 다짐을 하며 고개를 천천히 주억거렸다. 난 부엌에서 요리를 하고서 음식을 TV 앞의 식탁으로 가져가는 길에 종종 음식을 떨어뜨리곤 했다. 지극히 평균적인 빈도의 실수였지만, 자취경력이 오래될수록 이런 일상의 기본적인 실수는 자책의 강도가 심해진다. 


 이틀 치 분량의 카레를 엎었을 때 가족이 함께 살고 있었다면, 가족 구성원 누군가가 ‘바보 아냐’ 식의 핀잔을 줄 것이다. 어머니가 툴툴거리면서 같이 치워주거나, 아버지가 오늘은 외식할까. 라는 제안을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취생활은 달랐다. 무언가를 엎었다면 그저 온전히 자기 자신의 책임. 다른 이의 개입은 전혀 없다. 캠코더로 찍어서 남겼더라면 좋았을 정도의 화려한 실수를 해도, 단지 그뿐이다. 그리고 끝없는 정적이다. 어디에도 웃어주는 사람이 없다. 그저 온전한 자책만이 남는다. 


 “제가 치울까요.”

 “...”


 좁은 복도에서 제노스가 상당히 본격적인 가정부의 모양새로 물어왔다. 왠지 화들짝 놀라서 뒤돌아봤다. 자취생활이 길어서인지 본의 아니게 동거인의 존재를 자주 잊는다. 동거한지 꽤 시간이 지났는데도 말이다. 만일 가족이 있었더라면 방금 실수는 더 나았을까, 라는 식의 짧은 망상도 헛짓이 되었다. 제노스는 별 거리낌 없이 내 옆에 꿇어앉았다. 그리고 혐오스러운 모양새로 변한 카레를 긁어모아 치우기 시작했다. 비닐봉투에 카레가 묻은 휴지가 쌓여갈수록 나는 잡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제노스 녀석 없었더라면 커다란 고기 정도는 대충 씻어서 다시 먹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지금 내가 청소를 도와주는 제자를 원망할 시점인가.' 


 "선생님."

 "응?"


 나는 자각도 없이 제노스를 원망스레 노려보고 있었던 것 같다. 카레의 고기 때문에 제자를 노려보다니 최악의 스승이라 해도 할 말이 없다. 화나셨습니까? 라는 물음에 나는 시선을 재빨리 아래로 거두었다. 차마 동거인의 존재 때문에 고기를 버리게 되어 아쉽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이번 카레에 고기 꽤 많이 넣었기 때문에."

 "핫."


 제노스가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솔직히 믿을 수 없었다. 무슨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제노스가 웃다니. 그건 매우 짧은 찰나의 순간이었다. 제노스가 웃는 건 처음 본다. 동거를 함께 한 이래로 처음이다. 제노스는 아예 무표정하거나 시종일관 비장한 타입이었다. 웃음거리가 되어 기분이 나쁘기보다 저 녀석도 웃는구나 싶어서 신기했다.


 “죄송합니다. 웃지 않았습니다.”

 “너 웃었잖아.”

 “아닙니다. 단순 재채기였습니다.”

 “입꼬리 올라가는거 봤다고!”


 제노스는 눈동자까지 끄더니 침통하게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10분정도 더 추궁했더니 거의 핼쓱해질 정도로 당황하는 것 같았다. 방금의 대화로 본인도 모르게 웃어버린 모양이다. 왠지 흥미로워져서 제노스의 얼굴을 더욱 자세히 뜯어보며 추궁하기 시작했다.


 “임마. 웃었잖냐.”

 “웃지 않았습니다.”

 “웃었잖냐.”


 제노스는 안절부절 못하면서 휴지더미가 모인 비닐봉투를 묶기 시작했다. 


 “오늘은 어쩔 수 없이 외식할까요.”

 “말 돌리지 마라.”

 “무슨 메뉴를 원하십니까.”

 “고기 먹고 싶은데 고기집 갈까.”

 “핫.”



 제노스는 고개를 푹 숙이더니 또 웃음을 터뜨렸다. 이 녀석 개그코드 의외구나. TV에서 아무리 웃긴 장면이 나와도 단지 화면을 노려보는 수준의 텐션 유지하고 있던 놈인데. 이번 대화는 대체 뭐가 웃기다는 건지.


 “너 방금은 정말 웃었지.”

 “죄송합니다. 거의 불가항력이어서요.”

 “난 별로 웃기지 않은데.”

 “죄송합니다.”


 제노스는 꿇어앉아 연신 사죄했다. 정말 귀찮았다. 두 번째의 웃음은 정말 확실하게 들켜버렸기 때문에 수습도 되지 않았다. 어찌나 처절하게 곤란해 하는지 나에게까지 그 곤란함이 전해져 와서, 처음엔 재미있다가 슬슬 왠지 나까지 땀범벅이 되었다. 나는 저 녀석이 웃는 모습은 처음 봤다. 작은 입술이 미묘하게 뒤틀리는 경우는 간혹 목격했지만, 그건 악인을 해치울 때에나 볼 수 있는 비웃음 류였다. 그리고 그것은 적의가 서린 느낌이었다. 핫, 하고 소리까지 나는 웃음은 처음 목격했다. 


 오늘의 저녁밥이 될 예정이었던 카레를 시원스럽게 엎었기 때문에, 제노스의 말마따나 오늘은 외식을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밖은 약간 쌀쌀한 것 같아서 후드 집업을 걸쳤다. 현관을 나와보니 후드 집업으로 될 일이 아니었다. 다시 들어와서 파카를 챙겨 입었다. 제노스는 약간 침통한 기세로 한동안 복도의 벽에 기대서 서 있더니 내가 외출하려는 낌새를 알아채곤 곧 신발을 찾아 신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합류한 제노스와 맨션을 빠져나와 천천히 걸었다. 제노스는 죽은 듯이 조용히 따라왔다. 발자국 소리는 그래도 꾸준히 가까워졌다. 저녁의 길가는 한산했다. 찌륵찌륵 벌레가 우는 소리는 들려왔다. 날은 꽤 어두웠고 가로등에는 하루살이 따위가 꼬여대는 풍경이 스산했다. 날씨가 어제보다 이상할 정도로 많이 추워진 것 같다.


 제노스는 보기에 불쌍할 정도로 비척비척 걸었다. 웃어버린 죄를 사면해주고 싶지만 어째 그게 죄라기엔 좀 웃기지 않은가. 용서해 주기에도 뭣하다. 이걸 질책한다면 정말로 나쁜 스승이다. 게다가 제노스는 이미 스스로 자기 자신을 수십 수백 번 혼내고 있는 중인 것 같다.


 “제노스, 너는 카레를 엎는다던지 하는 슬랩스틱 코미디 좋아했구나.”

 “아닙니다. 그냥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습니다. 추호도 비웃으려는 의지는 없었습니다. 저는 사이타마 선생님이 얼마나 대단하신 분인지 잘 알고 있고, 존경하기 때문에 설령 저를 웃기려고 하셔도 웃지 않을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시끄러, 너 두 번이나 웃었잖아.”

 “정말 죄송합니다.”

 “혼내는 건 아니야... 웃는 걸 오늘 처음 봐서 그러지.”

 “네? 이번이 처음으로 웃은 건 아니잖습니까. 매번 사과하지만요.”



 ...아니? 나는 절대로 오늘 처음 보는데? 왠지 이상해서 고개를 갸웃했다. 그동안 내 시선이 닿지 않는 구석에서 실실 쪼개왔다 이거냐. 


 제노스는 어떤 경우에 웃는걸까? 방금의 카레 사건에서 제노스를 웃게 만들만한 요소가 궁금했다. 겉옷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걸으며 제노스의 개그코드에 대해 생각했다. 좀체로 결론이 나질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뒤에서 발자국 소리가 가까워지더니, 귓가로 훅 하고 제노스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제노스의 엔진의 열기가 끼쳐온다. 그리고 믿을 수 없는 내용의 말이 이어졌다. 


 “저 실은 선생님이 조금 귀여워서 웃었습니다.”

 “뭐. 제노스. 너 미쳤냐?”


 저렇게까지 막 나가는 제노스는 처음 본다. 아, 실은 머리가 다 어질어질 할 정도로 놀랐다. 제노스는 일을 저질러 놓고선 연신 고개를 숙여 사죄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그런데 사죄하는 목소리가 약간 경쾌해지더니 이내 웃음이 되어버렸다. 말 그대로 웃음소리였다. 믿을 수가 없었다. 제노스는 오늘 대체 몇 번을 웃는 것인지.


 “아까부터 너무 귀여워서, 약간 초조합니다.”

 “???”

 “고기집에서 적당히 고기 먹고 나서는 섹스할까요.”

 “....?????”


 처음에는 제노스가 미친 놈인 줄 알았다. 웃는 걸 빌미로 너무 갈궜더니 미쳐버린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나에게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다음 날의 오전, 정신병원에서였다. 




-



 “사이타마 씨는 기억상실입니다.”

 “그럴 리가요.”


 정신과 의사는 깔끔하게 결론 내렸다. 보호자인 제노스의 설명이 장황했으므로 이 결론까지 오기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결론을 들은 나는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내가 기억상실이라니. 옆의 보호자 의자에 앉은 제노스는 나보다도 더 심각한 표정이었다.


 “최근에 매우 큰 충격을 받은 일이 있습니까?”

 “사이타마 선생님은 최근에 카레를 엎은 일이 있었습니다.”


 제노스가 냉큼 대신 대답했다. 그런 수치스러운 거 대신 대답하지 말라고.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뭔가, 제노스가 주제넘게 어제부터 묘하게 나서는 느낌이라 불쾌했다. 아니 내가 제노스를 깔본다기 보다는 우리가 그다지 친하지도 않으니까... 라는 거리감에서 드는 생각이다.


 “그것보다 큰 충격적인 사건은 없습니까?”

 “그게 선생님에겐 일상의 큰 충격이었을 겁니다.”

 “...”

 “...”


 정신병원을 빠져나오며 제노스가 내게 요약해준 내용은 이렇다. 나는 고기를 듬뿍 넣은 카레를 엎었다. 그리고 그 충격으로 최근의 기억을 일부분 잃어버렸다. 아무리 인간은 망각하는 존재라지만, 카레를 엎은 충격 따위로 기억을 잃다니 너무 창피한 설정이지 않은가. 상담하던 의사도 약간 입꼬리 올라가 있던 것 같았다. 이 자식. 환자를 비웃지 말라고. 


 그리고 정말 믿을 수 없게도 기억을 잃기 전의 나는 제노스와 석 달정도 사귀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나는 카레를 엎었고, 반년치의 기억만 정확히 들어내 버리듯 사라진 것이다. 그래서 카레를 엎기 이전의 제노스는 내가 기억하는 제노스가 맞고, 카레를 엎은 이후의 제노스가 내 기억에 없는 제노스인 것이다. 어쩐지 단 하루만에 날씨가 추워져서 이상하다는 생각은 했지만 계절이 바뀌어 버렸을 줄이야. 이야기를 듣자하니 나는 제노스와 상호 합의를 거쳐서 사귀는 중이었고, 심지어 종종 섹스도 한단다. 믿어지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카레를 엎고 난 뒤의 제노스는 묘하게 분위기가 가벼웠고, 나와 전보다 허물없는 느낌이었다. 기본적인 비장함은 그대로였지만... 제노스는 내게 귀엽다는 소리를 해댈 위인이 아니었다. 그리고 절대로 웃는 모습을 보여주지도 않았다.



-



 “우리 왜 사귀고 있었어?”

 “어느 날 제가 우동을 먹고 집으로 오는 길에 고백했습니다.”

 “에엑. 우동 먹고 돌아오는 길?”

 “더 좋은 기회를 잡고 싶었지만... 왠지 좋은 분위기를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에에엑.... 우동 먹고 돌아오는 길.... 그랬냐...”


 눈에 띄게 실망하는 내 모습을 관찰한 제노스는 나를 따라서 약간 시무룩해졌다. z시로 돌아오는 길은 여전히 추웠다. 나는 이렇게까지 추운 날씨가 기억에 없으므로 억울할 지경이었다. 하루아침에 날씨가 지독하게 추워졌다. 군데군데 얼음이 얼어 있는 거리를 걸으면서, 제노스도 나도 줄곧 우울했다. 제노스 녀석도 우울하긴 마찬가지일 것이다. 솔직히 믿을 순 없지만... 연인을 잃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나는 왜 그때 yes 한거야?”

 “선생님은 반 년치 기억 없으시니까 모르시겠지만. 저희 서로 좋아했습니다.”

 “에...에에엑....”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나는 제노스를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좋아할 리가 없다.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계속 좋아할 이유가 없다. 물론 나쁜 녀석이라곤 생각 안한다. 아니 오히려 좋은 놈이라고 생각하지만... 입 맞춘다던가 배 맞춘다던가. 그런 상상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다. 하늘에 맹세코. 그냥 적당히 사정 맞아서 함께 사는 동거인일 뿐이다.


 “어쩐지 사이타마 선생님이 제가 좀 웃은 정도로 화 내셔서, 놀랐었습니다...”

 “나야말로, 너가 웃어서 놀랐는데...”

 “...”

 “...”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나도 제노스도 말이 없었다. 저 녀석도 황당하겠지만 나야말로 황당함의 차원이 다르다고. 너는 연인이 자기랑 사귄 적 없다고 말하는 것 뿐이니까 그냥 적당히 헤어졌다고 생각해버리면 되잖냐. 나는 생판 남이라고 생각했던 동거인에게 내가 헉헉거리며 입 맞추고 있었다는 사실을 나조차 모르고 있었단 말이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한숨은 입김이 되어 형체가 생겼다가 멀리 사라졌다. 


 “선생님, 앞으로 제가 다시 좋아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아니. 그럴 필요 없어.”


 대답은 당연히 거절이었다. 제노스는 대답이 없었다. 어느새 눈은 쌓이기 시작해서 집으로 올라가는 계단 난간에 하얀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



 사실 반 년치 기억이 조금 없어졌다고 해서 내 일상에 금이 가지는 않았다. 힘이 없어진 것도 아니라서 히어로 일 하는데 딱히 문제가 되지도 않는다. 오늘은 내 기억상실이고 뭐고 상관없이 유부초밥을 해 먹을 생각이다. 도시락 특집 요리 프로를 보다보니 왠지 유부초밥이 먹고 싶어졌으므로 오늘 점심은 유부초밥으로 정했다. 후식으로 방울 토마토도 사고 싶었지만 생각보다 비쌌다. 계절이 바뀌어서인가. 방울 토마토를 포기했으니 유부는 좋은 걸로 구매했다. 집에 오자마자 유부를 칼로 갈라서 벌렸다. 식탁에 도마를 깔고 이런저런 준비를 하는데, 제노스가 돕겠다고 다가왔다. 나는 병원에 다녀온 이후로 제노스의 존재가 묘하게 더 불편해졌으므로 괜찮다고 대답했다. 


 “선생님, 단지 돕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혼자서 할 수 있어.”

 “언제나 요리는 제 담당이었습니다.”

 “때에 따라 번갈아가며 했던 것 같은데.”

 “사귀게 된 이후로는 온전히 제 몫이었습니다.”


 나는 약간 아찔해질 정도로 당황했다. 내 기억에 없는 내가 무슨 짓을 했었는지 모르는 점이 너무 무서웠다. 나는 사귀고 나면 생각보다 뻔뻔해지는 타입인가.


 “선생님은 제가 해 주는 밥이 좋다고 하셨으니까요.”

 “그랬었나.”


 내 기억에 없는 나는 제노스와 한바탕 붙어먹은 이후에 원룸 어딘가에 드러누워서 [힘이 없는 것은 네탓이니 밥이나 차려와] 따위의 말을 했었는가. 그리고 죄책감도 없이 날름날름 그걸 집어먹었는가. 실제로 이게 우려나 망상이 아니라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상당한 공포였다. 나는 묵묵히 요리를 계속했다. 제노스는 요리를 돕지 않아도 좋다는 나를 기어코 설득해서 식탁 구석에 자리를 잡아서 실파를 잘게 써는 중이다.


 “저는 선생님을 여전히 좋아합니다.”

 “미안하지만 마음 천천히 정리하면 되겠네.”


  제노스는 실파를 썰다가 내 말에 동요해서인지 자연스럽게 자기 손가락도 썰어버렸다. 지직거리는 기계음이 들렸다. 정적이 감돌았다. 제노스는 파칫파칫 전류가 감도는 손가락을 주워들고 조용히 일어섰다.


 “파츠, 갈아끼우고 오겠습니다.”

 “그러던지.”

 “실은 절대로 마음 정리할 생각 없습니다.”


 정말 내가 기억상실이긴 한 것 같다. 제노스는 놀라울 정도로 내게 대들고 있었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제노스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완고한 기세였다. 평소 자기 의견은 거의 없던 놈이었다. 내가 시키는대로 다 하던 녀석이었다. 역시 사귀게 되면 사람은 변하는가. 무섭구나, 반 년이라는 세월... 본격적으로 사귀기 시작한 것은 3개월 뿐이라고 들었지만.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제노스가 파츠를 갈아끼우고 돌아왔다. 돌아오자마자 제노스는 또 지겹게 말을 걸어왔다.


 “선생님께서 다시 저를 좋아하게 만들겠습니다.”

 “다시 좋아하게 될 일 없을 거야.”


 유부초밥이랑 같이 먹으려고 끓이는 미소국이 부글부글 끓어 넘치는 것 같았다. 부엌 쪽에서 수증기가 뭉게뭉게 올라왔다. 제노스가 손가락까지 한번 갈아끼우고서 말한 것은 일종의 선전포고 같은 것이었다. 상당히 제노스다웠다. 목표를 말하고 나서 각오를 다지는 방식이었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며 당근을 썰었다. 칼이 잘 들지 않기에 그냥 당근을 주먹으로 쥐어짜서 부스러뜨렸다. 손가락 사이로 당근이 부슬부슬 떨어지는 감각을 느끼며, 귀찮은 일이 하나 늘었네... 라는 생각이 들었다. 별로 대꾸조차 해주고 싶지 않았다.


 “우리는 하루에도 여러 번 키스했습니다.”

 “에에엑...”

 “그리고 가능할 리가 없지만 저는 선생님 몰래 아이 신발 모으는 취미 있었습니다.”

 “임마, 가능하겠냐.”


 제노스는 정말로 아기 신발을 가져와서 보여주었다. 남자 애 것도 있고 여자 애 것도 있었다. 비싼 브랜드들 같았다. 그리고 생각보다 양이 많았다. 이 놈, 정말 머리가 어떻게 됐던 거 아닐까. 기억에 없는 과거의 나에게 이 신발들을 들켰어도 혼났을 게 뻔하다. 나는 약간 측은하기까지 한 기분으로 제노스를 보았다.


 “괴인을 무찌른 날이면 먼지라던지 오물 많이 묻으니까 같이 목욕했습니다.”

 “...”

 "얼굴의 거품 닦아드리다 또 키스하고 그랬습니다."


 제노스가 밥 먹기 전에 입맛 떨어지는 소리를 해대는 통에 나는 얼굴이 일그러졌다. 제노스는 뭔가 추억거리를 하나씩 열거하며 센치한 모양이었는데, 나는 영 비위가 상했다. 밥 먹기 전에 그런 입맛 떨어지는 얘기 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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